돛대도 아니 달고 - 백무산
1
생전에 뵙지 못한 권정생 선생께서 가신
안동병원을 찾았지만
나는 곧 빈소를 잘못 찾아왔음을 알았습니다
고인은 아직 집에 계신 듯, 문상객들의 눈치놀음이
데면데면한 것이 민망하여 술자리를 물리고
집으로 조문을 갔습니다
마을 이름 하나만 믿고 마을에 와서도 집을 묻지 않았습니다
집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을을 지나 집의 언저리까지 끌고 온 내 짐작은
지붕이 보일 무렵 그만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마당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사정없이 뛰었습니다
순식간의 일이었습니다
생전에 일면식도 없던 선생의 집에 와서
민망하리만큼 눈물 적셨습니다
헛간채보다 못한 적빈의 살림살이가
눈물겨워서가 아니었습니다
2
얼치기 반풍수가 보기에도
이곳은 집이 앉을 땅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흉사에나 쓸 물건이나 상여를 넣어둘 곳집이 있거나
역병 든 사람 죽음길 보내는 초막이 있거나
흉한 곳에 흉한 것을 두어 흉을 좀 눌러보자고
복 바랄 일 애당초 가망없고 처절함만이라도 면해보고자
빌고 또 빌어보던 골매기 성황당이나 있어야 할 터였습니다
게다가 마냥 열린 북쪽에서 닥치는 칼바람이
수시로 집을 헐뜯고 뒷산 빌뱅이 언덕이
의붓자식처럼 내다버린 곁줄기 하나가
집터에 이르기 전에 이미 숨이 끊어져 사룡(死龍)이 되어 있었고
뒤에서 무력하게 흘러온 개울물은
집을 외면하고 저 가기 좋은 길로만 바삐 가고 있었습니다
땅속은 골수가 빠진 뼈처럼 부스러져 있었고
습한 기운은 집의 아랫도리를 뱀처럼 휘감고 있었습니다
3
아, 이곳에 누워 얼마나 외롭고 얼마나 아프셨을까
뼈마디 마디 저미는 숱한 밤을 어찌 지새우셨을까
음산한 죽음의 그림자가 아랫마을을 범하기 전에
그 길목을 지키며 얼마나 많은 밤을
살을 파고드는 두려움과 싸우신 것일까
굳이 흉한 곳에 몸을 두어
대속하신 것일까
삶을 대속물로 드린 것일까
죄의 대속물 같은
고통의 대속물 같은
대속으로 흘리신 피 같은
그것이 선생의 글이었을까
세상의 흉한 터가 문학의 본적지일까
4
나의 두 눈은 불에 데인 듯 뜨거워져
선생의 집을 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크게 잘못 읽었을까 두려웠습니다
마당 앞에 놓인 범상치 않은 바위에 비친
맑은 기운 하나도 놓치고 있었습니다
나는 집을 나와 밭을 가로질러 멀리 나아갔습니다
마을이 한눈에 보일 때까지
개울을 따라 한참 나아가 뒤돌아보았습니다
그곳에서 본 선생의 집은
강아지 꼬리 형국으로 흘러내려온 산줄기 아래에
똥무더기 하나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 똥무더기가 선생님의 집이었습니다
5
그러자 내가 무엇을 못다 읽었는가를 알았습니다
선생님의 그 철부지 마음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 놀던 대로 다리를 벌리고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습니다
그러자,
아, 그곳에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건 집이 아니라 작은 쪽배였습니다
낮달 같은 쪽배를 타고 구름 물결에 둥실 뜬
선생이 계셨습니다
그 쪽배는 세상을 떠메고 있었습니다
여위고 창백한 뼈 마디마디 다 드러낸 낮달 같은 쪽배에
눈물겨운 세상을 다 떠메고 있었습니다
그만 놓아드려야겠습니다
질긴 업장의 밧줄 하나 풀어드려야겠습니다
집을 허물어 배를 띄워야겠습니다
쌀밥 고봉밥 같은 어매 사는 나라로
목화솜같이 따듯한 여인 하나 사는 나라로
그만 훨훨 놓아드려야겠습니다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