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지 않는 물 - 정호승
나는 젖지 않는 물이다
봄이 와도 뿌리에 가닿지 못하고
지금까지 젖지 않는 물처럼 살아왔다
오늘은 소년인양 신나게 물수제비를 뜨다가
무심코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용서했으면 때리지 말고 때렸으면 용서하지 말라고
강물이 웃으면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나는 저벅저벅 강물 속으로 젖지도 않은 채 걸어 들어간다
물은 딱딱하다
젖지 않는 물은 늘 딱딱하다
딱딱한 물을 헤치고 청둥오리 한 마리 웃으면서 다가와
내 손을 잡는다
청둥오리가 평생 자맥질을 하며 이끄는 길
그 푸른 물의 길은 어디인가
청둥오리는 끝내 나를 데리고 물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저 멀리 강둑 위에
용서할 사람과 용서 받을 사람의 그치지 않는 싸움을 바라본다
바람이 분다
강둑의 나무들이 칼집에 칼을 꽂지 못하고
칼을 든 채 울고 있다
잊을 수는 없으나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은 거짓이다
거짓을 위하여 더 이상 목숨을 바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청둥오리의 손을 놓고
등 뒤에서라고 더욱 너를 껴안기 위하여
자맥질을 하면서
딱딱한 강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시평』2006.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