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캐며 - 오세영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신(現身)은
얼마나 찬란한 경이(驚異)이더냐.
음(陰) 6월 해가 긴 날의 어느 하루를 택해
호미로 밭두렁을 허물자
우수수 쏟아지는 감자, 감자
겉으로 드러난 줄기와 잎새는
시들어 보잘 것 없지만
흙속에 가려 묻혀 있던 알맹이는
튼실하고 풍만하기만 하다.
부끄러 스스로를 감춘 그 겸손이
사철 허공에 매달려 맵씨를 뽐내는
능금의 허영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보이지 않는 것은 보이는 것의 어머니
세상이란 보이지 않는 반쪽이 외로 지고 있을지니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현신(現身)은
얼마나 아름다운 경이이더냐.
*한국문학 2004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