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속임 - 김상미
나는 띄엄띄엄 산다
살지 않을 때는 책 속에 들어가 논다
책 속에 오래 들어가 있다 나오면
책 밖에서 바쁘게 돌아가던 사람들이 무섭게 화를 낸다
나를 아무 것도 모르는 저능아 취급을 한다
그래도 나는 띄엄띄엄 사는 내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때때로 세상은 나를 지배하지만
나는 세상엔 관심이 없다
지배는 구속보다 더 냉혹하다
냉혹은 내가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냉혹이란, 인정이 없이 가혹함을 말한다
가혹함이란, 몹시 까다롭고 혹독함을 말한다
냉혹과 가혹함이란 인간에게보다는 짐승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다.
나는 배고픈 야생 고양이가 어두운 쓰레기통을 뒤지다
별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후다닥 내 가슴에 꽂을 때마다
세상에 대한 격렬한 슬픔에 소스라쳐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만다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한다
이 집 저 집을 뒤지며
이 사람 저 사람을 상심케 하지 못한다
나는 띄엄띄엄 산다
하루 종일 책 속에 들어가
열 살도 안 된 어린애가 되기도 하고
일흔 살 노인으로 훌쭉 건너뛰기도 한다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집필자보다도 더 영특하게
어떤 물음표도 나를 향해 던지지 않을 때!
그 힘으로 나는 산다
띄엄띄엄,
세상 향해 터지는 찬란한 언어의 폭죽들
아름답다, 아름답다, 목마르게 감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