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
자신이 하루종일 시간에 멱살을 잡혀 끌려 다닌 흔적들을 날마다 문자로 정직하게 실토해 놓은 고백록.
외등
어둠 속에 박혀 있는 달마의 물기 어린 눈알 하나.
들국화
기러기 울음소리가 하늘을 청명하게 비우고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달빛을 눈부시게 만들면 바람에 실어보낸 그리움의 언어들은 그리움의 언어들끼리 모여 달빛에 반짝이는 시詩가 된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안타까운 사랑도 아무리 벽이 높아 닿지 못할 사랑도 가을 들녘에 모여 꽃이 된다. 바람이 전하는 한 소절의 속삭임에도 물결같이 설레이며 흔들리는 꽃이 된다. 이름하여 들국화다.
도자기
담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살림도구가 아니라 비우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서 만들어진 예술품이다. 그 속에 일월이 뜨고 지고 그 속에 세월이 강물처럼 흐른다. 깨달음에 이른 자들은 그 속에 온 우주가 들어있음을 안다.
눈물
지상에서 가장 투명한 시.
시
석탄속에 들어있는 목화구름.
예술
술 중에서 가장 독한 술이다. 영혼까지 취하게 한다. 예술가들이 숙명처럼 마셔야 하는 술이다. 모든 예술작품은 그들의 술주정에 의해서 남겨진 흔적들이다. 거기에는 신도 악마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아름다움만이 존재할 뿐이다.
새치
검은 머리카락들 사이에 섞여 있는 소수의 은빛 머리카락. 젊음이 다했다는 경보신호. 노인이 되기 위한 예행연습. 세월의 또 다른 흔적.
지팡이
황혼의 동반자.
똥
대자대비의 표정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또 하나의 부처님.
새벽
매복하고 있던 어둠이 은밀히 살해당하고 빛의 첨병들이 낮은 포복으로 진군해 들어오면 새벽이다. 사물들이 어둠의 포박에서 풀려 나와 조금씩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면 청소부들이 살해당한 어둠의 부스럭지들을 비질하고 도시는 나지막하게 기침을 하며 잠을 깬다. 시간이 청명하게 세척되어 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바로 이 시간에 남을 위해 기도한다. 신이시여. 영혼의 어둠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도 당신의 새벽이 오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