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사랑에 대한 착각을 최종까지 수정하지 않은 남녀들이 마침내 세월의 함정 속에 공동 투신하는 사건.
주름살
인간이 나이를 많이 먹으면 세월이 그가 걸어 온 인생여정을 그의 피부에다 빠짐없이 설형문자로 음각해 놓는데 한결 같이 칼날에 베인 듯이 예리하다. 육안이나 뇌안으로는 판독불능이지만 심안이나 영안으로는 판독이 가능한 대장편 서사시. 눈물이 많았던 인간일수록 주름살의 골은 깊어지고 근심이 많았던 인간일수록 주름살의 잔가지가 무성하다. 생각이 진중한 자는 노인을 대할 때 그 주름살을 보고 천지의 고요함을 배운다.
낙엽
수확의 가을이 끝나면 나무들은 잎을 떨구어 자신들의 시린 발목을 덮는다. 바람이 불면 세월의 편린처럼 흩날리는 갈색 엽신들. 모든 사연들은 망각의 땅에 묻히고 모든 기억들은 허무의 공간 속에 흩어져 버린다. 나무들은 인고의 겨울 속에 나신으로 버려진다. 낙엽은 퇴락한 꿈의 조각들로 썩어가지만 봄이 되면 다시금 푸르른 숲이 된다. 숲의 영혼을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사형수
세상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선고받은 사람.
철새
떠돌던 나그네의 영혼이다. 날개를 얻어 구만리장천을 날 수는 있어도 아직 윤회의 바다를 다 건너지는 못했다. 계절이라는 이름의 건널목에서 날개를 접고 앉아 잠시 안타까운 사랑을 배우다 떠날 갈 뿐이다. 모든 건널목마다 이별이 기다리고 모든 건널목마다 재회가 백지화된다. 달밤에 떼를 지어 윤회의 바다를 건너갈 때 그 울음소리를 듣고도 눈시울을 적시는 사람은 진실로 나그네의 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갈대
시린 가을 하늘가에 빠르게 한 획씩 그어놓은 신선의 가벼운 세필 자국.
실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반의 칼을 맞고 피흘리는 영혼으로 절망의 터널에 내팽개쳐 지는 상태. 믿음도 백지화되고 소망도 거품화되고 사랑도 사막화된 상태.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착각에서 깨어나 제정신을 되찾음으로써 홀로 비탄의 강물에 수장되는 상태. 사랑과 증오의 전환점. 그러나 이성간의 전형적인 사랑은 대개 실연까지가 그 사랑의 완성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