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듐을 발견하므로 원자력 시대를 연 퀴리부인은 폴란드 태생으로 본명은 마리아 스클로드프스카입니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그녀는 놀랍게도 그동안 학계에서 발견됐던 원소와는 전혀 다른 새 원소, 즉 끊임없이 에너지를 방사하고 있는 원소를 발견하여 그것을 라듐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녀는 1891 년 파리 소르본 대학 이학부에 입학함으로써 과학의 길에 일생을 바치게 됐습니다. 그녀의 파리 생활은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웬만한 추위에는 난방도 없이 석탄 두 부대로 한겨울을 지내곤 했습니다. 먹을 거리를 살 수 없어 몇 주일 동안 빵과 물로만 끼니를 때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영양실조로 대학 강의실에서 졸도를 하면서까지 그녀는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파리에 온 지 3 년 후, 그녀는 남편 퀴리를 만나 같이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들 부부는 수백 가지의 화학 물질을 조사하고 무엇이 방사선을 내는가를 조사, 연구하여 마침내 우라늄보다 방사능 강도가 2백만 배나 높은 금속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원소의 이름을 그들 부부는 라듐이라 명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라듐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물질의 존재를 증명시켜 주기 위해 5 년 동안 0.1g의 라듐 결정을 추출해 냈습니다. 퀴리 부인은 이 공로로 35세에 남편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상을 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몇 년 후에는 노벨 화학상까지 수상했습니다.
이 무렵 라듐이 암의 치료에 이용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이용하면 수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과학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생각으로 한푼의 돈도 받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방사선 치료반을 조직하여 부상자들을 치료했으며 원자력 연구기금 마련을 위한 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퀴리부인은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남편 대신 파리대학 물리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34 년 7월, 67세의 나이로 퀴리부인은 숨을 거두었습니다. 악성빈혈과 오랜 세월 방사능에 노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동은 만사의 기본이니 노동하는 자는 문명과 진보와의 구조이며, 화려한 둥근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R. G. 잉게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