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그림을 보면 느낌이 어떠한가? 이 그림은 반복적인 형태의 화면을 의도적으로 조작하여, 우리가 볼 때 시각적으로 어지럽고, 정신없고, 그림이 움직이는 듯한 착시가 일어나, 한 부분을 오래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그림을 우리는 ‘옵티컬 아트’ 줄여서 ‘옵아트’ 라고 부른다. 3년 남짓 지속된 ‘옵아트’는 단명했다. 전성기에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실패했다. 착시를 이용한 시각의 놀이가 유치하게 여겨진 것일까? 하지만 탈근대를 지향하는 최근의 철학적 분위기와 컴퓨터가 주도하는 최근의 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옵아트’라는 현상을 최소한 지금보다는 더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옵아트’ 하면 떠오른 이름 중의 하나가 브리짓 라일리다. 그녀의 작품 <물결>(1964)을 보자. 위에서 아래로 그려진 수많은 곡선들이 화면에 크고 작은 물결을 일으켜, 바라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만든다. 분명히 정지된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의 눈은 그 안에서 수많은 운동을 보고, 그 속도감에 아찔한 현기증까지 느끼게 된다. 라일리에게 자연은 현상이라기보다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시간이 정지된 곳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옵아트’가 내는 "공시적 운동"의 효과다.
바사레이에 따르면 작품이란 모름지기 언제든지 반복가능하고, 얼마든지 증식 가능해야 하며, 어떻게든 변경 가능해야 한다. 그는 기본 모티브를 반복하여 사방으로 증식시켜 나가는 가운데 조금씩 뉘앙스를 변화시키는 계열적 작업방식을 사용했다. 그렇게 만든 작품은 만화경을 연상케 한다. 만화경의 효과도 마주보는 거울을 이용해 하나의 모티브를 대칭구조로 무한히 복제하는 데에 있지 않은가!
수학적 디자인, 계열적 처리와 같은 ‘옵아트’의 작업방식은, 그것이 행해지던 60년대보다는 차라리 오늘날 컴퓨터가 주도하는 미디어 환경에 더 어울린다. 그뿐이 아니다. 그 동안 ‘옵아트’는 주로 '지각'의 심리학이라는 측면에서 현상학적으로 설명되어 왔다. 하지만 철학의 분위기가 6, 70년대와는 현저히 달라졌다. ‘옵아트’의 본질을 제대로 드러내려면 이보다는 좀 더 깊은 철학적 해석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옵아트’를 올려놓을 해석의 지평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옵아트’ 앞에서 인간은 모든 것을 잊고 놀이를 하는 천진난만한 아이가 된다. 놀이에 몰두한 아이에게 시간은 정지된다. 아니, 그는 다른 종류의 시간대에 살게 된다. ‘옵아트’의 체험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물리적 움직임은 없는데도, 요란한 심리적 움직임이 있다. 여기서 운동은 통시성이 아니라 공시성의 축을 따른다. 시간은 멈추었는데, 사건은 무한히 반복하여 일어난다. 아무 시간도 아닌 것이 모든 시간을 포함한다. 정중동(靜中動), 혹시 이게 니체가 말한 ‘영겁 회귀’의 놀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