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입에 사는 도깨비다. 입을 열면 나타났다 닫으면 이내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상황에 따라 튀어나오는 말도 다르다. 하지만 문자는 말에 실체성과 형태를 덧입힌다. 옷을 입은 도깨비랄까. 문자와 표기의 체계는 말을 하나의 기계나 물건처럼 통일성을 갖는 실체로 만든다.
실체가 된 말은 규율이 되어 틀리면 불편해한다. 가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 “‘감사합니다, 축하합니다’면 충분한데, 왜 ‘감사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하나? 이치에 안 맞는데도 국립국어원에서는 ‘관행’이란 이유로 허용했다”며 씁쓸해한다. 방송에서 들은 ‘말씀 주시면’이라는 말도 거슬린다고 한다. “‘꼼장어’가 표준어가 아니라고?” “‘쭈꾸미’랑 ‘오돌뼈’도 틀렸다고?” “뭐? ‘겁나게’가 사투리라고?” 항의한다.
단골 복사집에서 ‘제본 다 되었읍니다’라고 보내온 문자를 받으면 반갑다. 나는 사람마다 말에 대한 기억과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이런 어긋남과 겹침이 좋다. ‘돐’이란 말도 그립지 아니한가. 북한말 ‘닭알’은 달걀을 다시 보게 한다.
문득 의문이 든다. 무엇이 바른가. 바르게 쓴다는 건 뭘까. 과거와 현재가 단절보다는 겹치고 뒤섞이는 말글살이는 불가능할까. 왜 우리는 하루아침에 ‘돐’을 버리고 ‘돌’을 써야만 하는 구조에 살고 있을까. 나와 다르게 쓰거나 바뀌는 말에 왜 이토록 화를 낼까. ‘올바르게 말하기’에 지나친 강박증을 갖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녹슨 양철문에 써놓은 ‘어름 있슴’을 보면 즐겁던데. 올바른 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잡종이듯 말도 잡종이다.
정재환님께 답함
지난주엔 방송인이자 한글운동가인 정재환님께서 실명으로 “김지네씨, 잘 바써요”라는 재미난 댓글을 달았다. 헌신적인 한글운동가가 굳이 맞춤법을 어기며 쓴 것도 말걸기의 방식이다. 환영한다. 아마 ‘되었읍니다’, ‘돐’, ‘어름 있슴’에 대한 나의 과도한 포용주의와 과거지향적 정서, 또는 그간의 ‘언어자유주의적, 언어시장주의적’ 태도를 보고 내놓은 반응인 듯.
지난 칼럼은 말(표기법)의 잡종성을 가로막는 제도에 질문을 하자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썼던 철자가 하루아침에 바뀌고, 비표준어이니 쓰지 말라고 하다가 갑자기 오늘부터는 써도 된다는 과정 자체를 문제 삼자는 것이다.
이 문제의 뿌리는 한글맞춤법에 있다. 맞춤법은 언어적 근대의 산물이다. 민족어라는 단일한 언어질서를 만들기 위해 동일성을 강조하다 보니 다른 모든 정체성과 차이를 배제했다. 언어적 근대는 지역, 세대, 성별, 계급, 직업의 차이에 따른 말의 잡종성을 외면해야 가능하다. 표준어는 비표준어를 배제한다. 표준어 제정 권한을 국가나 엘리트들에게 집중시킨다. 지금도 똑같다.
언어적 근대를 넘어서자. 우리 시대는 말의 잡종성을 어떻게 전면화할지가 과제다. 일단 성문화된 맞춤법을 없애고 공통어의 결정권을 시민과 사회적 역량에 맡기자는 것이다. 맞춤법을 고치면 되지 않냐는 주장은 비본질적이다. 국가가 ‘이걸 표준어로 해줄까 말까’를 정하는 방식은 시대착오적이다.
한글운동 하시는 분들께 부탁한다. 말의 단일화보다 말의 다양화를 위해 더 애써 달라. 말은 구름 같아서 우여곡절을 겪을 뿐, 살고 죽는 문제는 아니다. 릴랙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