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문자를 쓴다거나 안다고 하는 말은 일반적으로 한문 능력을 가리켰다. 그만큼 한문은 대표적이면서도 지배적인 기록 수단이었다. 후에 훈민정음이 만들어져 언문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때도 한문은 한 수 높은 ‘진서’라고 일컬어졌다.
지금은 누구도 한문을 진서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자의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본 사람은 새로운 진서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바로 영어로 된 글이다. 과거의 한문이 동아시아 정도를 지배했다면 이제 영어는 명실공히 세계를 뒤덮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이다.
대학에서 개설한 강좌에는 ‘원서 강독’이라는 강의가 있다. ‘원서’의 사전적 의미는 베끼거나 번역한 책의 ‘원래의 판본’이다. 그러나 실제로 강의에 사용되는 ‘원서’는 그저 영어로 된 교재일 뿐 그것이 어떤 ‘원래 판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오히려 이것저것 짜깁기한 것이 더 흔하다. 그런데도 영어로 된 책은 ‘원서’라는 호칭을 얻고, 한국어 서적일 경우는 분명히 ‘원서’의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그러한 이름을 쓰지 않는다. 어느 언어가 지배적인지 한눈에 드러난다.
우리가 한문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자랑하고는 있으나 사실은 한문에서 영문으로 지배 체제만 바뀐 게 변명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 지식은 예나 지금이나 ‘번역된 지식’의 수준에서 ‘원천 지식’의 주변부만 맴돌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글자 자랑보다는 창의적인 글쓰기를 통해 지식 생산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들어서는 일이 더욱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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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함
우리가 하는 일부 행동들은 남이 먼저 수행한 행위가 전제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무언가에 ‘반대하는 행동’은 누군가가 선행하는 어떤 행동을 했을 때에야 가능하다. 곧 ‘반대’는 누군가의 ‘의견’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행위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의한다’는 행위 역시 상대방의 ‘의견’이나 ‘제의’가 앞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뚱딴지같은 말이 된다.
컴퓨터나 인터넷의 각종 이용 도구를 처음 사용할 때는 그 사용 약정을 읽고 ‘동의 여부’를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약정문의 길이도 엄청나지만 글자의 크기도 깨알 수준이어서 일일이 읽어가며 태도를 정할 수가 없다. 또 각종 서류 양식 기준에 따르다 보면 그 약정문에 동의를 아니 할 재간도 없다. 결국은 찜찜하지만 ‘동의함’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동의 역시 그 상품 제공자의 의견이나 제안이 있어야 맥락이 제대로 성립한다. 그러나 인터넷 이용 도구나 상품의 약정에서는 제공자의 요구와 일방적인 개념 정의만 있을 뿐 자신들의 책임이나 의무를 명시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것이 없는 ‘동의’는 사실상 ‘동의함’이라고 쓰고 ‘승복함’이라고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생산자와 판매자가 시장을 지배하면서 나타나는 패배한 소비자의 모습이다. 이제는 각종 규약이나 약정의 문장 자체가 ‘소비자의 맥락’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시장은 상품 제공자들만의 힘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상품 제공자와 소비자의 균형 잡힌 상호 행위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