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올바르게 쓴다고 하면 대개는 문법이나 맞춤법을 틀리지 않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사실 맞춤법이나 발음이 틀려 오해를 빚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맥락에서 어떤 ‘의도’를 의심받을 때 사태는 심각해진다. 그래서 말실수를 했으면 ‘적대적 의도’가 없었음을 이해시켜야 한다. 만일 그런 노력을 안 하고 방치하면 그것은 ‘언어적인 도발’이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일부 정치인들이 ‘교통사고’라든지 ‘세금도둑’이라는 말을 내뱉어 지탄을 받았다. 분명한 의도가 있는 도발이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윤리적인 맥락을 비틀어버린 것이다. 만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도 ‘총기사고’라 한다면 어찌 될까? 총을 쏜 사람의 행동은 안 보이게 된다. 결국은 말하는 이의 ‘의도’에 다른 뜻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일제 때 징용당했던 조선인들을 이제부터 ‘구 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라고 일컫기로 했다 한다. ‘징용’이라는 의미가 사라진 것이다. 곧 무엇을 ‘의도’하는지가 뻔히 보인다. ‘강제로’ 끌려갔다던 노동자들이 삽시간에 ‘피해자’가 아닌 보통의 ‘취업자’들이 된 것이다. 그들이 보통의 취업자들이었다면 이른바 ‘강점기’니 ‘식민지 시대’니 하는 말들 모두 일종의 착시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럴 때 왜 그들이 그렇게 고통스럽게 일했는지 그리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끈질기게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자면 ‘위안부’ 할머니들 문제에서처럼 ‘피해자 중심의 접근’이 중요하다. 2차 대전 때 큰 피해를 입은 유대인들에 대한 유대감이 당시 연합국의 승리를 더욱 값지게 한 것과 같다. 유대인들도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서 죽은 것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야말로 전쟁 이후의 모든 보편적 윤리와 가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도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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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큰사전
사전 편찬이라 하면 으레 학자들이나 출판사가 나서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우리 국어사전은 국가 기관인 문화부 산하의 국립국어(연구)원이 나서서 ‘표준국어대사전’을 만들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전이 정부의 지원으로 편찬 중에 있다. 바로 통일부에서 지원하는 ‘겨레말큰사전’이라는 ‘작품’이다.
‘겨레말큰사전’은 남과 북이 공통 국어사전의 모습을 어떻게 만들어야 통일 이후에 유용할지를 미리 설계해보는 사업이다. 이 사전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오해가 있다. 무엇보다 남과 북의 언어를 한방에 통일하는 사전이라는 오해가 가장 크다. 실제 사용을 목표로 한 그러한 사전은 공통의 규범이 정해진 다음에야 가능하다. 아마 이번 사전은 ‘서로 수용 가능한’ 공통 규범과 그 현실성을 검토하는 사전이라 말하는 게 옳을 듯싶다. 통일사전은 그러한 단계 없이 툭 하고 하늘에서 떨어질 수 없다. 독일은 분단 이전에 이미 공통된 규범을 완비했기 때문에 이러한 단계가 필요 없었다.
혹자는 그게 무에 그리 중요하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한다. 통일이 되면 남과 북의 사전을 그냥 합해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비꼬기도 한다. 그것은 남과 북의 철도를 마주 이어만 놓으면 되지 않느냐는 식의 단순 논리이다. 또 너무 많은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고 있지 않느냐는 의문에는 그간의 사전 편찬 진행을 힘들게 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보라고 넌지시 일러주고 싶다.
이 사전의 ‘편찬사업회’는 법정 사업 기관이기는 하나 시한이 정해져 있어 시간이 지나면 국회가 그때마다 기간을 연장해주어야 한다. 오랫동안 남과 북의 관계가 경직되어 있다가 이제야 기지개를 켜면서 다시 걸음을 내디디려 한다. 사업 기간도 국회에서 다소 여유를 주었다고 한다. 남은 기간에 그동안 밀렸던 행보를 힘차게 나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