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럽다는 말의 ‘잡’은 순수하지 못하고 이것저것 뒤섞인 것이라는 뜻이다. 대상의 가치를 낮추어 보는 말이다. ‘잡것, 잡놈, 잡년’과 같은 말은 아예 사람의 품격을 낮춰 보게 만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순수’라는 것이 과연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잡’이란 말이 들어가도 그 의미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경우가 꽤 있다.
‘잡곡’이 건강에 더 좋다고 한다. ‘잡지’에는 이런저런 유익한 정보가 꽤 많다. ‘잡채’나 ‘잡탕’, ‘잡어매운탕’도 이젠 어엿한 메뉴에 속한다. 한때는 ‘잡기’와 ‘잡학’이라는 말에 깔보는 의미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것들도 다 ‘교양’ 속에 들어가 있다. 아직 ‘잡담, 잡소문, 잡음’ 등에는 부정적 의미가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잡담 같은 방송프로도 많고 잡소문 전하는 뉴스도 많다. 잡음은 오히려 기계 작동의 문제를 알려주는 신호음 구실을 한다. ‘잡초’도 환경 보전에는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며 ‘잡념’이 새로운 착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사람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잡상인’이라는 말은 잡스러운 상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점포 가진 상인들이 고정된 점포를 가지지 못한 상인들을 경계하며 쓰는 말이다. 옛날의 과거시험에는 ‘대과’가 있고 ‘잡과’가 있었다. 대과는 요즘 말하는 인문학에 가까운 분야로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리고 잡과는 공학이나 의학 같은 기술직이었고 신분이 낮았다.
세월이 흘러 새로운 분야가 대세가 되었다. 요즘 어느 인문학도가 감히 공학과 의학을 잡과라 하겠는가? 그저 ‘문송합니다’ 하고 뒷전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시대 아닌가. 잡된 것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다양한 가치를 보여준다. 그렇게 되면 낡은 것도 새로워질 수 있고 작은 것도 더 커질 수 있는, 기회가 넉넉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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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중독증
1991년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 가입함으로써 ‘사실상’ 별개의 나라가 되었다. 분명히 ‘조국은 하나다’였는데 ‘하나였다’가 된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를 가리키는 말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한민국’ ‘우리나라’ ‘한국’은 다 같은 말인가? ‘대한민국’은 남한의 헌법상 국호이다. 특히 축구 응원에서 ‘대한민국’을 많이 썼다. 그러다가도 남북 친선 축구에서는 그 말을 삼갔던 것만 보아도 그 느낌이 온다.
한 방송을 보니 “불가리아(약 11만㎢)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크기의…”라는 설명이 나온다. 이때의 ‘우리나라’는 남한(약 10만㎢)을 가리키는 셈이다. 베트남(약 33만㎢)에 대한 소개에서도 “우리나라의 약 3.3배에 달하는 면적에…”라는 표현은 우리나라를 남한으로 말할 때 가능하다. 우리에게 우리나라란 여권 없이 마음대로 쉽게 오가는 영토를 가리키는 셈이다.
반면에 ‘한국’이라 하면 남북한을 통틀어 가리키는 느낌이 든다. 인터넷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한국 전쟁’ ‘한국어’ ‘분단 한국’ 등의 표현에서도 ‘한국’이 남북을 다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를 보여준다. ‘한국사’에는 북한 역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그러나 지난 평창겨울올림픽 폐회식에서 토마스 바흐 올림픽위원장은 “한국과 북한이 평화를 위해 함께했다”고 치하했다. ‘남한과 북한’이라고 했다면 별로 어색하지 않았을 텐데 ‘한국과 북한’이라고 대등하게 나열한 것 자체가 마치 비문법적인 말 같아 보였다.
이러한 낯선 표현은 앞으로 국면이 바뀌어 가면서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한국이 남북한 같기도 하고 남한 같기도 한 여러 장면이 나타나는 경우 말이다. 이 모두 우리의 지독한 분단 중독의 후유증이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낯선 말들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슬슬 그 중독에서 깨어나야 한다.
한겨레말글연구소 연구위원·전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