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 어느 겨울방학에 영동으로 이사한 벗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원도로 가는 줄 알았더니 강 건너 서울로 이사한 친구였다. 강남(江南)보다 영등포의 동쪽인 영동(永東)이 널리 쓰이던 때였다. 전화 걸어 알아낸 새 주소의 동네 이름이 재미있었다. 이웃에는 ‘구정동’과 ‘뒷구정동’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 이름이었다. ‘진관내(진관외)동’과 ‘상수(하수)동’처럼 ‘내-외’, ‘상-하’로 나뉜 동네가 있던 시절이니 ‘앞-뒤’도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앞구정동’으로 쓴 편지는 제대로 배달되었다. 갈매기(鷗, 갈매기 구)와 친하게(狎, 친할 압) 지낸다는 뜻을 담은 정자 ‘압구정’을 까맣게 몰랐던 1970년대의 일이다.
압구정동을 비롯한 동 이름이 주소에서 사라진다. ‘도로명과 건물번호’로 이루어진 ‘도로명 주소’가 내년부터 시행되기 때문이다. 이에 맞서 ‘전통과 역사를 담고 있는 지명을 없애면 전통문화를 누릴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이 나왔다. 여기에는 ‘체육관로’, ‘디지털로’ 따위는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기에 주소로 부적절’하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새 주소를 써도 지금껏 써왔던 동 이름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행)지번과 (도로명)주소는 이원적 체계로 운영’되고 ‘동 제도·명칭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임의적으로 표기할 수 있다’는 게 정부 방침이기 때문이다. ‘기존 주소 체계는 1918년 일제가 도입한 것’으로 ‘새 주소는 예전부터(1318년) 써왔던 집 중심 체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번호 사이는 ‘-’로 표기하고 ‘의’로 읽는다”는 대목은 왠지 반갑다.(안전행정부 자료) 하지만 ‘엘씨디로’(파주), ‘테라피로’(영주), ‘크리스탈로’(인천 서구)는 작명 취지를 떠나 손봐야 할 길 이름이다. ‘엘시디-’, ‘세러피-’, ‘크리스털-’로 해야 외래어표기법에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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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출-갹출
아나운서 사무실에는 다양한 문의 전화가 온다. 그 가운데 표준어와 표준발음, 맞춤법 관련한 내용이 빠질 리 없다. 아나운서는 우리말의 이모저모를 꿰뚫고 있다고 믿는 시청자들 덕분에 공부를 게을리할 수 없으니 고마운 일이다. 이런 질문은 저녁 이후 시간에 많다. 그 까닭은 ‘내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느 것이 맞다 답하면 전화기 너머로 환호와 탄식이 엇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미루어 그렇다. 아나운서는 ‘밥값(술값) 내기’의 심판자가 되기도 하는 셈이다.
아나운서들에게 걸려오는 전화에는 바람직한 언어 사용을 위한 제안이나 방송언어 오남용을 걱정하는 쓴소리를 담은 내용도 있다. 며칠 전 “방송에서 ‘더치페이’(Dutch pay)는 용인하면서 ‘분빠이’(分配)를 거부하는 것은 형평에 어긋난다”는 전화를 동료 아나운서가 받았다. ‘더치페이’는 ‘각자내기’로 이미 다듬은 말(국립국어원, 2011년)이니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영어에서 왔건 일본어에서 왔건 둘 다 ‘각출’의 뜻”이라며 이어간 시청자의 볼멘소리 때문에 문제의 초점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몇몇에게 물으니 30대 이상은 ‘각출’을, 20대는 ‘갹출’을 처음 듣는다 했다. 각출(各出)은 ‘1.각각 나옴 2.각각 내놓음’, 갹출(醵出)은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럿이 돈을 나누어 냄’이다. 어느 학원 강사가 “‘각출’은 같은 비용, ‘갹출’은 각자 능력껏 다른 금액을 부담하는 것”이라 가르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밥값 5만원을 다섯 명이 1만원씩 내면 ‘각출’, 누구는 3만원을 내고 어떤 이는 5천원을 내서 5만원을 만드는 것은 ‘갹출’이니 ‘더치페이’에 딱 들어맞는 것은 ‘각출’”이라 밝힌 칼럼(ㅈ일보)도 있다. 근거 없는 주장이다. 2000년 이전 신문에는 추렴의 뜻인 ‘갹출’과 주식(경제) 용어인 ‘각출’(殼出)을 구분해 썼지만 최근에 국립국어원은 두 낱말을 한뜻으로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