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뉴스에 ‘하천 전투기’가 등장한 적이 있다. 미국 제너럴 다이내믹스가 1964년부터 1976년까지 562대를 생산한 이 전투기의 본명은 ‘F111’이다. 멀쩡한 제 이름 두고 다른 것으로 방송 전파를 탄 까닭은 엉뚱한 데 있었다. 뉴스를 전한 아나운서가 로마자 ‘F’(에프)와 숫자 ‘111’을 한자 ‘下川’(하천)으로 오독한 것이다. 육필 원고가 대부분이던, 한자를 섞어 갈겨써 ‘해독’이 필요했던 시절에 벌어진 일이다. 비슷한 시기에 ‘춘래불이춘’이라 구성지게 읊은 방송인도 있었다.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네(春來不似春)’의 ‘似’(같을 사)를 ‘以’(써 이)로 잘못 보았기 때문이었다.
‘춘래불사춘’이라 하지만 입춘이 지났으니 봄의 문턱이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봄’을 만났다. 슈만의 ‘봄’은 트럼펫으로 봄의 열망을 드러내며 씩씩하게 시작했고, 바이올린 선율로 새들의 지저귐을 담아낸 비발디의 ‘봄’은 싱그러움으로 빛났다. 흔히 봄을 ‘여인의 계절’이라 하지만 봄날의 여인이 아름답게만 읽히는 것은 아니다. 손로원의 노랫말에 박시춘이 가락을 입혀 백설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의 ‘연분홍 치마’는 왠지 처연하고, ‘씹어 무는 옷고름’은 봄날 보내는 이의 절절함을 더한다. 이은상이 노래한 ‘봄 처녀’에는 ‘새 풀 옷 입고’ 날갯짓하는 ‘봄처녀나비’의 팔랑거림이 ‘하얀 구름 너울’에 겹쳐 보이는 듯하다.
봄의 ‘말밭’에는 여느 계절에 없는 게 있다. ‘봄을 맞아 이성 관계로 들뜨는 마음이나 행동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봄바람이 본보기이다. 그저 부는 바람인 가을(겨울)바람과 다른 것이다. 봄기운, 봄나들이, 봄노래, 봄놀이, 봄맛, 봄소식 따위도 다른 철에는 나타나지 않는 조어다. 방 한쪽의 매화가 수줍은 듯 하얗게 꽃망울을 터뜨린다. 그러고 보니 오는 월요일은 우수다. 때는 바야흐로 봄, 봄날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