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세조 때 병조판서가 되었다. 예종 즉위년(1468년) 시월, 남이는 역적으로 몰렸다. 장용대의 ‘진쟈근디·맹불생·이산’ 등이 남이와 한 무리가 되어 역적모의를 했다고 같은 부대의 ‘오마수’가 발고하였다. 맹불생을 잡아 묻자 자못 불지 않아 형을 가하니 불므로 목을 베었다. 진쟈근디 등 스물 남짓을 국문하였으나 오직 ‘보리·이산충’만 자복하였다.
밑말 ‘오마’가 든 이름에 ‘오마/오마이·오마동이·오마대·오마디·오마사·오마쇠’가 있고, 비슷한 이름에 ‘올마·올마대·올마디·올마지’도 있는데, ‘오마·올마’가 무슨 뜻인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름접미사에 ‘-수’가 있다. ‘걸수·검수·난수·똥수·만수·말수·박수·손수·옥수’와 같은 사내이름에 쓰인다. 이름접미사 ‘-수’가 요즘에도 사내이름에 널리 쓰이는 것은 이러한 내림으로 보인다.
비슷한 이름접미사에 ‘-시’와 ‘-실’도 있다. ‘-시’는 주로 계집이름에 쓰이며, ‘막시·백시·복시·옥시·은시·학시’가 보인다. ‘-실’이 든 이름으로는 ‘검실이·넙실이·막실이·망실이·멍실이·몽실이·뭉실이·방실이·북실이’가 보인다.
훈구 세력에게 위협이 되던 남이·강순 등이 제거되었다. 예종은 신숙주·한명회를 비롯한 서른여덟 명에게 ‘익대공신’(翊戴功臣), 곧 ‘정성스럽게 모신 공신’이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