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와 바위
제주의 땅이름 형태는 뭍과 다른 점이 많다. ‘빌레’는 제주말로 ‘너럭바위’를 뜻한다. 남제주 대정 지역의 ‘넙은빌레·빌레못·답단빌레’ 등은 너럭바위에서 나온 이름이다. 이 ‘빌레’의 표준형은 ‘별내’다. 별내는 비탈을 뜻하는 ‘별’에 ‘장소’ 또는 ‘물’을 뜻하는 ‘내’가 합쳐 된 말이다. 제주에서만 ‘빌레’가 나타나 낯선 땅이름처럼 보인다.
땅이름 변화에는 지역에 따른 말소리 차이가 큰 영향을 끼친다. 고개를 뜻하는 ‘모르’나 ‘머르’,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뭍을 뜻하는 ‘고지·코지’와 같은 말들도 받침이 없는 형태인데, 이는 제주말의 소리마디에 받침을 잘 안 쓰거나 유성음을 많이 쓰는 경향과도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렇기에 제주 방언에는 ‘르·앙·엉’으로 끝나는 명사가 많다. 또 뭍과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탓에 이 지역 말에는 옛말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특징이다.
비탈의 ‘별’과 낭떠러지의 ‘낭’이 합쳐져 ‘벼랑’을 이루듯, 비탈진 곳의 바위만을 별도로 ‘빌레’라고 부른 것은 땅이름의 지리적인 특성을 반영하는 셈이다. 제주에서 빌레와 바위는 유의어로 쓰이는데, 바위는 간혹 ‘방구·방귀’로 불리기도 한다. 바위가 많은 마을인 남원읍 신흥리는 ‘방구령’이라고 불렸다. 이 말은 생리현상인 방귀를 연상하게 하므로, 한자 표기에 거북 구를 쓰다가, 아예 신흥리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바꿨다. 마을 서남쪽에 앞빌레가 서 있는데도 생소한 땅이름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보여준다.
허재영/건국대 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