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高宗:628~683)의 황후였던 즉천무후(則天武后)때의 이야기이다. 14세 때 2대 황제인 태종(太宗)의 후궁이 된 그녀(무후)는 26세 때 태종이 죽자 여승이 되었으나 재색(才色)을 탐낸 고종의 명예 따라 환속(還俗), 그의 후궁으로 있다가 고종 6년(655)에 황후가 되었다. 그 후 고종이 중풍에 걸리자 무후는 스스로 천후(天后)라 일컫고 수많은 명신(名臣)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고 전 황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는 등 포악한 정치를 했다. 고종이 죽은 뒤 무후의 친아들인 중종(中宗:4대)?예종(叡宗:5대)을 세웠으나 곧 폐하고 67세 때(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周:690~705)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제(女帝)가 출현한 이 정변을 무주 혁명(武周革命)이라고 한다.
그 무렵, 적인걸(狄仁傑:630~700)이라는 청렴 강직하고 식견이 높은 명재상이 있었다. 그는 더없이 잔인하고 명석한 무후를 직간(直諫), 보필하여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유능한 선비를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했다. 그래서 그는 조야(朝野)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따라서 적인걸의 문하에는 많은 인재가 모여들었는데 그 중에는 원행충(元行沖)과 같은 박학다재(博學多才)한 인물도 있었다. 그 원행충이 어느 날, 적인걸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공(相公) 댁에는 ‘맛있는 것(훌륭한 인재)’이 많습니다. 혹 과식하시어 배탈이 나는 일이 없도록 저 같은 쓴 약도 곁에 놔두십시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良藥苦於口而利於病], 충언을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다[忠言逆於耳而利於行]’는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자 적인걸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바로 내 얄롱중물일세[君正吾藥籠中物].’ 임, 하루라도 곁에 없어서는 안 되고 말고[不可一日無也].”
[주] 적인걸 : 산서성(山西省) 사람. 당나라 고종(高宗) 때 강남 순무사(江南巡撫使)가 되어 치적을 쌓은 뒤 위주 자사(魏州刺史)로 있을 때 거란의 침략군을 물리쳐 공을 세움. 재상으로 있을 때 즉천무후(則天武后)에게 직간하여 그녀의 친조카인 무삼사(武三思)로 하여금 황통(皇統)을 잇게 하려는 대역(大逆)을 막고 당황실을 회복, 수호하는 데 힘씀. 이후 국로(國老)로 예우 받음. 예종(睿宗) 때 양국공(梁國公)에 추봉됨.(630~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