唐나라 때 4대 시인(四大詩人)의 한 사람으로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중 굴지의 명문장가로 꼽혔던 한유(韓愈 : 字는 退之)는 768년 지금의 하남성(河南省)에서 태어났다. 그는 9대 황제인 덕종(德宗 : 779-805) 때 25세의 나이로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뒤 이부상서(吏部尙書)까지 되었으나 황제가 관여하는 불사(佛事)를 극간(極諫)하다가 조주자 사(潮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 파직(罷職) 당했다가 다시 등용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상을 떠났다.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는 '한유(韓柳)'로 불렸을 정도로 절친한 벗인 유종원(柳宗元 : 字는 子厚)과 함께 고문부흥(古文復興) 운동을 제창하는 등 학문에 힘썼다. 그 결과 후학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에 대해《唐書》'韓愈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당나라가 흥성한 이래 한유는 육경(六經)을 가지고 여러 학저들의 스승이 되었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학문은 더욱 흥성했으며, 그래서 학자들은 한유를 '泰山北斗'를 우러러보듯 존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