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양지인(宋襄之仁)
/ 지나치게 착하기만 하여 권도(權道)가 없음을 이르는 말.
《出典》'十八史略' 卷一
춘추시대인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 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이 세상을 떠났다. 환공이 병석에 있을 때 태자인 자부(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굳이 사양했다. 그래서 자보가 위(位)에 올라 양공(襄公)이라 일컫고 목이를 재상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7년 후(BC 643), 춘추(春秋)의 첫 패자(覇者)인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죽고, 송나라에는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이는 패자(覇者)가 될 징조라며 양공은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여섯 공자(公子) 간에 후계 다툼이 치열한 제나라로 쳐들어가 공자소(昭:孝公)를 세워 추종 세력을 만들었다. 이어 4년 후에는 송(宋), 제(齊), 초(楚) 세 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目夷)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禍根)'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기를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교(通交)한 정(鄭)나라를 쳤다. 그러자 그 해 가을,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군을 파병했다. 양공은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河南省)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으나 전군(全軍)이 강을 다 건너왔는데도 공격을 하지 않았다. 목이가 참다못해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사오니 적이 전열(戰列)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그러나 양공은 듣지 않았다.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는 법이오."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 결과 숫적으로 열세(劣勢)였던 송나라 군사는 참패했다. 그리고 양공 자신도 허벅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이 악화되어 이듬해 죽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송나라 양공의 인(仁)'이라며 비웃었다.(世笑以爲宋襄之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