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焚書坑儒)
중국 진시황이 민간의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일.
《出典》'史記' 秦始皇紀 / '十八史略' 秦篇
기원전 221년, 제(齊)나라를 끝으로 6국을 평정하고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秦)나라 시황 제(始皇帝) 때의 일이다. 시황제(始皇帝)는 천하를 통일하자 주(周)왕조 때의 봉건 제도를 폐지하고 사상 처음으로 중앙 집권(中央執權)의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채택했다. 군현제를 실시한 지 8년이 되는 그 해(BC 213) 어느날, 시황제가 베푼 함양궁(咸陽宮)의 잔치에서 박사(博士)인 순우월(淳于越)이 '현행 군현제도 하에서는 황실의 무궁한 안녕을 기하기가 어렵다'며 봉건제도 개체(改體)할 것을 진언했다.
시황제가 신하들에게 순우월의 의견에 대해 가부(可否)를 묻자, 군현제의 입안자(立案者)인 승상 이사(李斯)는 이렇게 대답했다.
"봉건시대에는 제후들 간에 침략전이 끊이지 않아 천하가 어지러웠으나 이제는 통일되어 안정을 찾았사오며, 법령도 모두 한 곳에서 발령(發令)되고 있나이다. 하오나 옛 책을 배운 사람들 중에는 그것만을 옳게 여겨 새로운 법령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비난하는 선비들이 있사옵니다. 하오니 차제에 그러한 선비들을 엄단하심과 아울러 백성들에게 꼭 필요한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에 관한 책과 진(秦)나라 역사책 외에는 모두 수거하여 불태워 없애 버리소서."
시황제가 이사(李斯)의 의견을 받아들임으로써 관청에 제출된 희귀한 책들이 속속 불태워졌는데, 이 일을 가리켜 '분서(焚書)'라고 한다.
이듬해(BC 212) 아방궁(阿房宮)이 완성되자 시황제는 불로장수의 신선술법(神仙術法)을 닦는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여 후대했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을 신임했으나 두 방사(方士)는 많은 재물을 사취(詐取)한 뒤, 시황제의 부덕(不德)을 비난하며 종적을 감춰 버렸다. 시황제는 분노했다. 그런데 그 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시중(市中)의 염탐꾼을 감독하는 관리로부터 "페하를 비방하는 선비들을 잡아 가두어 놓았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시황제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엄중히 심문한 결과 연루자는 460명이나 되었다. 시황제는 자기를 비방한 460명의 유생(幼生)들을 모두 산 채로 각각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는데, 이 일을 가리켜 '갱유(坑儒)'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