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이 묻어나는 편지 - MBC 예술단 엮음
하나
추억이라는 이름의 웃음여행
취사병이 뭐길래 - 송현탁(남.광주 광산구 지정동)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일입니다. 국가이 부름을 받고 빡빡머리로 신병훈련소에 처음 입대했을 때부터 단체생활이란 얼마나 중요하며 개인 한 사람만의 잘못으로도 많은 전우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제가 한사람 편해보겠다고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우리 소대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생과 아픔을 안겨다 주었던지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며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지난날 함께 근무했던 우리 중대원들이 이 방송을 듣고 게신다면 굳이 부대를 밝히지 않아도 금방 기억하시고 배꼽을 잡으며 웃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훈련소에서는 우수한 병사 그리고 또한 특등사수로 인정받는 모범훈련병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십시요. 그렇다면 왜 많은 중대원들의 웃음거리가 되었고 놀림감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밝히겠습니다.
훈련소 교육기간중 취사장 사역병으로 두세 번 나가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취사병을 볼 때면 취사장 군기가 너무나 엄했고 짠밥을 만지는 취사병들이 항상 지저분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취사장에서 일을 해 보니 정말 가족적이고 마음 또한 편안했습니다.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자유시간 넉넉하고 물사정 또한 얼마나 좋은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취사장에서 근무하고 싶은 욕심이 서서히 들기 시작하여 함께 일하던 취사병에게 살며시 물어봤습니다.
"취사장에서 근무하려면 어떠한 자격과 기술이 필요합니까?"
이에 취사병 왈, 논산훈련소에서 조리사 주특기(752)를 받으면 어느 부대를 가든 취사병으로 일할 수 있지만, 여기처럼 예하부대 출신은 주특기 무조건 1로 시작되기 때문에 취사장 근무가능성은 희박하고 사회에서 요리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거나 아니면 부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히면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확률이 크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저의 주특기는 일빵빵(100)소총수. 드디어 6주간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자대배치 받아 중대장님께 신고식하던 날, 중대장님께서
"하고 싶은 얘기는 없나?"
하시기에 저는 서슴지 않고 "중대원들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취사장에서 열심히 근무하고 싶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사회경력이 있냐고 묻길래 대답했죠.
"예, 있습니다."
"어디에서?"
"중국집에서 철가방 생활 2년 했습니다."
중대장님은 저의 대답에 웃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취사장 T.O가 없으니 3소대로 가서 근무하라며 3소대장님께 인계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의 취사장 근무에 대한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지요. 그러나 제가 여기에서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한 가지 희망이 있었습니다. 훈련소에서 취사병에게 들었던 말대로 고문관이 되어 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부터 무슨 일이든 어떠한 역경과 고난이 몰아쳐도 이를 악물고 취사장에서 일할 수 있는 꿈이 실현될 때까지 충실한 고문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제식훈련 때의 일입니다. 우향우 하면 좌향좌로, 좌향좌 하면 우향우로, 뒤로 돌아 하면 거꾸로 돌고... 등등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 했습니다. 이종환씨! 이건 정말 어렵데요. 한번 몸에 배어 익숙해진 것이어서 생각대로 잘 되지 않더라구요. 그때마다 저는 빳다를 맞고 기합을 받지만 기합을 받을 적마다 머릿속 깊이 한 번 더 새겨둡니다. '취사병으로 가는 그날까지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육체는 고달파도 '조금만 참아다오'를 스스로 다지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습니다. 어쩌다 잘못하여 저도 모르게 같은 방향으로 따라서 움직일 때면 소대장님께서 칭찬을 하시며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바로 그거야.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저의 실수였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저는 소대장님의 칭찬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뜻한바 계획대로 고문관의 자세로 돌아갔지요. 이렇듯 남모르는 저의 실수 아닌 실수로 우리 중대에서 유별나게 우리 소대원들만이 제식훈련, 총검술, 태권도 등 반복되는 연습을 엄청나게 많이 했지만 군 정신이 강한 저의 끈질긴 노력으로 결과는 항상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안되겠는지 하루일과 후에는 매일 꼭 한 사람씩 저에게 붙여주면서 모든 기본동작을 책임지고 가르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일과 후에 하는 훈련은 제가 어느 정도 하는 척합니다. 왜냐? 소대장님이나 중대장님 안 계실 때 얻어맞고 얼차례 받는 건 순전히 다 공짜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잘해요. 이 고참들이 때리는 것은 정말로 무식합니다. 그리고 국방부 등록된 기합이란 기합은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저에게 다 실험을 하거든요. 그렇지만 다음날 교육시간에는 마찬가지로 반대로만 합니다. 그뿐인 줄 아세요. 총검술, 태권도시범 등 순서와는 관계없이 뒤죽박죽으로 열심히 하면 저를 지켜보는 중대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웃음바다가 되고 너무나 좋아들하지만 저는 그 뒤에 있을 육체적인 고통과 완전군장으로 연병장 돌 생각을 하면 등에서 땀도 나질 않습니다. 그리고 사격장에서는 어쩐 줄 아세요. 내 표지판에는 한 발도 쏘지않고 옆사람 표진판에 다 쏴버리고, 그렇잖으면 허공을 향해 무작정 발사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사격장에서도 정신통일이란 구호와 함께 사격 끝날 때까지 체력단련을 없이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아예 저에게 실탄을 지급해 주지도 않는 겁니다. 왜냐? 저같은 꼴통에게는 실탄이 아깝다는 것이지요.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저를 행정반으로 부르시길래 저는 생각했지요. '와! 이제 드디어 취사장으로 가는 모양이구나.' 그러나 착각의 기쁨은 잠시 중대장님은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무슨 애가 그 모양이냐? 나 9년째 군대생활하지만 너같은 저능아는 처음 본다. 너 학교 어디까지 나왔나?"
"네, 고등학교까지밖에 못 나왔습니다."
"그럼, 그 머리로 대학갈 생각도 했나?"
"아닙니다."
"그럼, 고등학교는 앞문으로 나왔나? 뒷문으로 나왔나?"
"네, 우리 학교는 정문 하나밖에 없어서 정문으로 나왔습니다."
"그럼 학년 전체에서 석차는 어느 정도였나?"
"네, 아마 제 뒤로 두 명이나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사실은 10위권에서 놀았거든요.)
"임마, 그게 무슨 자랑이냐?"
그러시며 지휘봉으로 제 머리통을 때리지만 평상시 얼마나 원산폭격을 많이 했던지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더군요. 그래도 고향이 같은 선임하사께서는 제가 불쌍하고 안쓰러웠던지 등을 토닥거리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못난 것도 죄냐? 너무 걱정말고 내무생활 착실히 하고 사고만 내지 않으면 걱정할 것이 없으니 내무반에 돌아가 푹 쉬어라."
고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해 주시기에 저는 더욱더 힘을 얻어 고문관의 길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분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취사장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아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그 동안 받은 설움과 얻어맞고 기합받았던 것이 너무나 아까워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시간이 4개월쯤 지났을까, 중대장님께서 소대장과 고참들에게 하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 송이병은 구제불능인 것 같으니 더 이상 애써 가르치려고 노력하지 말고 내무생활이나 잘하게끔 다독거리며 잘못한다고 해서 구타나 체벌 같은 짓은 절대 삼가라구."
아니! 맑은 대낮에 무슨 대포 날아가는 소리입니까? 언제나 쪼인타로 다리 다 망가뜨려놓고 이제 와서 포기하시다니, 좀 늦은감은 있으나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이후로는 누구 하나 저에게 관여하는 사람 없고, 꼴통과 고문관이라는 별을 갖고 다닌 채 쓰레기 소각장이나 화장실 청소, 하수구 정비, 울타리 보수 등 자고로 부대의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 환경파수꾼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가시밭 같은 4개월의 고문관 생활로 생각지도 않았던 환경미화원으로 발탁이 되다니 기대에는 어긋났지만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국방부 시계는 돌고돌아 저에게 일계급 진급이란 소식이 전해습니다. 군생활 열심히 한 동료전우나 군생활이 전혀 도움이 안된 저에게도 똑같은 날 중대장님 앞에 일병으로 진급했다는 신고식을 떳떳이 할 수 있게끔 공정한 심사를 해 주신 대한민국 국방부 인사과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일병으로 진급은 됐어도 환경파수꾼에 대한 변화는 없던 차에 행정반 마이크에서 위대한 송일병을 찾는 안내방송을 듣고 뛰어갔는데 선임하사이신 인사계님께서 대희보를 제게 주셨습니다.
"송일병, 취사장 허병장이 제대특명을 받아 며칠 후면 전역을 하게 됐으니 취사장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아니! 이게 무슨 주택복권 당첨된 소리입니까. 이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8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어야 했느데.... 저는 겸손한 자세로 대답했죠.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내무반으로 돌아가 따블백을 챙겨 취사반으로 가는 저의 발걸음는 마치 자유를 찾은 한 마리의 새였습니다. 그리고 취사장 근무 첫날부터 특혜가 주어졌습니다. 첫째, 취침점호와는 관계없이 일찍 잠을 잘 수 있다. 둘째, 불침번이나 외곽 근무는 일체사절이다. 셋째, 아침점호나 구호, 아울러 교육훈련까지 전부 열외다. 이종환 최유라씨, 취사장 끗발이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취사장 쫄따구라고 해서 소대 고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터치했다간 배식시간에 그 결과는 그대로 불을 보듯 뻔하게 나타나게 되니까 말입니다. 특히 고깃국 배식시간엔 두말할 것도 없지요. 그 동안 저에게 못할 짓 많이 한 고참들 고깃국 나오면 항상 위에 둥둥 떠있는 기름덩어리만 한국자 떠주고,저를 불쌍히 여겨 인간답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고참들에게는 국자를 깊이 넣어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왕건더기를 듬뿍 담아 주는 편파적인 배식을 계속했었습니다. 하루는 중대장님께서 취사장에 들어와 열심히 일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시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송일병 할 만하나?"
"예."
"너의 예전 모습은 이게 아니었잖아?"
"뭐가요?"
"그놈, 참 기특하게도 사람 많이 변했네."
이러시며 만족한 웃음을 흘리시며 나가시더군요. 한 번 고문관은 영원한 고문관이 아닙니다. 일단 세웠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피나는 인내와 끈질긴 노력을 했을 뿐이고 대한민국 군인이었기에 후퇴를 안했을 따름입니다. 함께 생사고락을 나누었던 전우들이여! 지금쯤은 일반 예비군들로서 사회에서 각자 맡은 임무에 충실하고 있겠지만 이 사람 또한 농촌의 일꾼으로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는 예비군 여러분! 요즈음 부정부패로 사회에 크나큰 사건들을 접하고 볼 때면 마음이 답답하고 울화통이 터질 때가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군대시절 한심스러웠던 저의 모습을 다시금 상상하며 스트레스를 확확 풀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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