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삶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저희에게 빌려 주신 삶을 겸손히 받아들이게 하소서. 그러면 죽음이 우리에게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삶은 또 하나의 과제라서 - 함께 살아가라는 , 함께 겪어 가라는 과제입니다. 이 어려운 날들에 서로를 다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근래에 읽은 벨기에 작가 카트린 제나베의 <이별에 부치는 구름>의 일절입니다. 가르멜수녀원에 계신 저의 언니 수녀님과 함께 수도생활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주셨던 외사촌 언니 숙영(소피아) 수녀님. 언니가 암으로 투병하다 몇 달 전 저 세상으로 떠나신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음은 제가 장례미사에 참석하지 못해서일까요?
"있잖아, 나 곧 죽는대. 조시 한 편 준비해 두렴."
어느 날 전화로 울멱이며 언니가 말했을 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후 언니는 병원에서 정릉의 본원으로 들어가 마지막 준비를 했습니다. 임종 한 달 전에 제가 찾아뵈었을 때 언니는 거의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
"숙영 낭자는 곧 떠나간다"
"이젠 갈증을 축이는 얼음조각만이 내 음식이야"
하며 밝게 웃으셨지요. 가회동에 살던 어린 시절, 저는 동생을 데리고 돈암동의 언니 댁을 자주 갔었는데, 그때의 어질고 단아한 여고생 모습의 언니가 늘 기억에 남는다고 했더니 추억에 잠긴 듯 즐거워 하셨지요. 언니가 제게 마지막 선물로 주신 십자가와 손수 만드신 앞치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언니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세리피나 수녀님은 얼마 전 제게 카드를 보내시며 언니로부터 진정한 사랑, 이해심, 성실함을 배우셨다고 했습니다. 언니의 무덤가에 언니가 좋아하는 백합꽃을 바치고, 인도 대신 평소에 늘 함께 바치던 성무일도를 바치셨다고 해요.
"언니, 죽음이 두렵지 않나요?"라고 제가 물었을 때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그런데 떠나는 일이 왜 이리 힘들까?"
라고 조용히 말씀하시던 그 평온한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극심한 고통 중에도 늘 남을 배려할 줄 알며, 자기중심적인 연민에 빠지지 않고 그토록 의연히 죽음을 맞이할 수 있던 언니가 부럽습니다. 저도 언니처럼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길 빌며 어느 날 묘지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묘지에서`란 한 편의 시로 적어 봅니다.
욕심을 다 벗어 버린
햐얀 뼈들이 누워 있는
이 침묵의 나라에 오면
쓸쓸하고 평화롭다
지워지지 않는 슬픔을
한 묶음의 꽃으로 들고 와
인사하는 이들에게
죽은 이들은 땅속에서
어떤 기도로 응답하는 것일까
돌에 새겨진 많은 이름들
유족들이 새긴 이별의 말들
다시 읽어 보며
나는 누군가 한 번쯤
꽃을 들고 올지도 모를
어느날의 내 무덤을
문득 생각해 본다
그때 나는 비로소
하얗게 타버린
한 편의 시가 되어 누워 있을까
사랑하는 이들로부터
잊혀지는 슬픔에서조차
온전히 해방된 가벼움으로
하얗게 삭아 내릴까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내려오는 길
하늘엔 노을이 곱고
내 마음엔
슬픔을 넘어선 한 점 평화가
흰구름으로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