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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마가렛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어찌 꽃들은 그리도 자기의 때를 잘도 알아 피고 지는 것일까. 늘 조심스럽고 성실하면서도 명랑한 모습의 한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조촐한 꽃. 수도자의 모습도 이와 같았으면 한다. 우리 성당 앞 십자로의 느티나무는 어느새 키도 많이 크고 잎사귀도 많이 달았다. 1991년 9월, 수녀회 60주년 기념식수로 심은 나무가 해를 거듭할수록 풍채를 자랑하고 있구나. 느티나무야. 너는 매일 성당의 종소리를 제일 가까이 듣고 있지? 수녀들의 인사 이동이 있을 적마다 떠나는 이들과 보내는 이들의 겉모습과 속마음을 누구보다 많이 지켜볼 수 있지? 우리집에 드나드는 다양한 손님들의 표정과 마음도 읽을 수 있지? 네가 곁에 있으므로 우리는 늘 정겨운 느낌이 들고 든든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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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장에 걸어 두었던 옷들을 다 꺼내어 다림질하고, 떨어진 곳은 꿰매고 하는 일이 즐거웠다. 사무실에서 하루 종일 서류를 만지는 일과는 다른 느낌이다. 늘 별것도 없는 빤한 살림인데도 한번 움직이려면 무엇이 그리 많은지. 좀더 깔끔하고 소박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미루어 두곤 하는 나를 반성한다. 정신의 소유도. 물질의 소유도 모두 필요 외에 여분으로 갖는 것은 자유로운 삶을 방해한다. 예전에 비하면 수도자의 삶의 양식도 많이 편리해지고 부유해졌다고 볼 수 있다. 각 개인이 자기 스스로 절제하고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타락하기 쉬울 것이다. 원내에 새 건물을 짓는 어수선한 틈을 타 30년 만에 도둑이 두 번이나 들어 우리 모두를 놀라게 했다. 한번은 우리가 깊이 잠든 밤에, 한 번은 우리가 길게 기도하는 주일 아침에 주방의 유일한 철창까지 부수고 들어와 마음놓고 볼일을 본 듯하다. 경리실의 높다란 유리문을 깨고 약간의 현금을 훔친 뒤 의자 뒤에 커다란 발자국까지 남겨 놓고 갔다. 그후로 할 수 없이 곳곳에 쇠창살을 하게 되니 날마다 투명하게 탁 트인 유리창으로 꽃, 나무, 하늘, 바다를 내다보던 나의 기쁨이 절반은 줄어든 셈이다. 30년 전의 이곳 산, 바다, 언덕은 평화로웠고, 문단속을 좀 소홀히 해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인심도 갈수록 각박해지고 이런 속에 살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도 답답하고 우울하다. 하지만 몇 차례나 우리를 몹시 놀라게 한 밤손님의 그 마음도 편치는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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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 우리 여기 놀이터에서 아주 조금만 놀다 가도 돼요."고 우리가 외출할 때마다 동네 어린이들은 우리 유치원을 가리키며 묻곤 한다. "그래. 조금만 놀다 가라.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응" 하고 대답하며 그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는 공간이 없음을 아쉬워한다. 어린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마음껏 뛰놀아야 어른이 돼서도 구김살없는 사랑을 할 수 있고 인생의 어려움도 잘 헤쳐 갈 수 있을텐데... 아이들의 웃음을 보니 내 마음도 밝아졌다. <시나라고 가는 길>이라는 어린이 시 낭송집도 들으며 동심으로 돌아가 본 날이었다. 어린이들의 순결한 목소리를 들으면 괜히 눈물부터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