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어제였다. 짐을 운반할 일이 있어서 용달차를 부르려니까 다 나가서 없단다. 할 수 없이 지나가는 빈 용달차라도 잡으려고 큰 길가로 나가니까 그곳에서 늘 짐을 지곤 하는 지게꾼 아저씨가 앉아 게셨다. 그와는 별로 얘기를 해본 적도 없이 오가며 그저 얼굴이나 익힌 사이였다.
"아저씨 용달차를 못 구해서 그러는데요. 제법 큰 짐인데 청계천 2가까지 가주실래요?"
아저씨는 선뜻 응했다. 가을 햇살이라고 해도 한낮의 햇살은 따가웠다. 빈 몸으로 걷는 나도 등에 땀이 배는데 저 아저씨는 얼마나 더우실까 싶어 나는 마음속으로 수고비를 후하게 작정하고 있었다. 한 시간은 족히 걸려 목적지에 닿아서 수고비를 드리려고 손지갑을 열려니까 그 아저씨는 황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돈은 무슨 돈이요. 서로 얼굴 아는 처지에, 처음으로 짐 한 번 져 드렸는데 그냥 두슈."
아저씨는 한사코 돈을 마다하시고는 일거리를 찾아 훌훌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가셨다.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 거주)
정직한 이들의 달 - 김승옥
응급치료실의 문이 활짝 열린다. 땀과 피로 걸레처럼 젖은 가운을 입은 의과 대학생이 들것을 무겁게 들고 비틀거리며 달리다시피 들어온다. 들것 위에는 대학 교복을 입은 한 젊은이가 입으로 피거품을 가쁘게 뿜어내며 꿈틀거리고 있다.
"중상입니다. 치료대는 어디 있어요?"
"치료대가 모자라요. 우선 중환자실로, 이쪽으로 오세요."
땀투성이의 간호사가 쉰 음성으로 말하며 벌써 앞장서 달린다. 사실, 그다지 좁지도 않은 치료실 안은 먼저 실려 온 총상자들로 꽉차 있다. 거의 모두가 스무 살 안팎의 대학생들이다. 그들의 옷에 묻어 온 화약 냄새와, 그들의 상처에서 솟아나는 피와, 그들의 고통스런 비명과 신음 그리고 긴장할 대로 긴장해 있는 간호사들과 의사들의 바쁜 손길로 치료실은 꽉차 있는 것이다. 데모 군중들의 함성과 합창소리 그리고 그 우렁찬 소리들을 침묵시키고야 말겠다는 듯 쉬지 않고 쏘아대는 경찰들의 총소리가 이 수도육군병원 복도에서도 만져질 듯 가까이 들린다.
"야단났어요. 부상자는 자꾸 들어오는데 손이 모자라는 건 손만이 아녜요. 피가, 피가 모자라서 큰일났어요. 더 이상 부상자가 늘어나면 수혈도 못 시켜 보고 죽일 것 같아요. 부상자가 많겠죠?"
금방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음성으로 간호사가 말한다. 수술실에서는 수술 도중에 죽은 부상자가 흰 시트에 덮여 실려 나오고 다른 부상자가 실려 들어간다.
"벌써 열한 명이 수술 도중에 죽었어요. 수술 받은 부상자 중에서도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명 명밖에 안 될 거예요. 수술받아 보지도 못하고 죽은 학생들도 있어요. 미쳤어요. 모두 미쳤어요. 왜 데모를 하구 또 왜 총을 쏘아 아까운 젊은이들을 죽이는지. 모두, 모두 미쳤어요."
"학생들은 미치지 않았어요."
들것에 실려 가고 있는 절은이가 피거품과 함께 띄엄띄엄 말을 토한다.
"우리는 학교에서 배웠어요. 부정한 짓을 하면 안된다구. 그래서 선거를 부정으로 한 사람들에게 선거를 공정하게 다시 하라고 말했어요. 그것뿐이에요. 미친 게 아니죠."
"말하지 말아요. 말하면 피가 더 나와요."
들것을 들고 가던 의과 대학생들 중 하나가 부상자의 말을 중단시킨다.
"이 학생, 데모 주동자인가요?"
간호사가 의과 대학생에게 묻는다. 들것 위의 젊은이는 고개를 젖는다. 그리고 말한다.
"학교 교과서가 주동자예요. 부정을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부정이라고 가르치는 교과서가."
"말하지 말라니까요. 피가."
중환자실 역시 부상자들의 비명과 신음으로 꽉차 있었다. 거기에 새로운 부상자들이 잇달아 들어오고 있다. 뜨거운 피는 쉼없이 흘러 상처를 틀어 막은 가제 뭉치를 적시고 베드의 비닐커버를 적시고 마룻바닥을 적신다. 간호사가 다시 달려나가서 혈액병을 들고 돌아왔을 때 그 젊은이는 거의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수혈하기 위한 차비를 하고 있을 때 그 젊은이가 눈을 뜬다. 그리고 마지막 힘을 다해 옆 병상의 고등학생 부상자를 가리키며 간호사에게 말한다.
"피가 모자란다면서요? 저 학생한테 먼저 수혈해 주세요. 난 나중에."
"체혈 지원자들이 많이 몰려왔어요. 피는 부족하지 않을 거예요."
"고맙군요. 어쨌든 저 학생부터 먼저."
"그렇게 하라고 교과서에 씌어 있던가요?"
"예, 그렇게 배웠어요."
젊은이는 미소지으며 말한다. 간호사는 젊은이가 시키는 대로 고등학생의 팔에 주사바늘을 꽂고 돌아와서 병상에 붙은 카드를 들여다본다. '김치호. 22세. 서울대학교 문리대 수학과 3학년'이라고 씌어 있다.
"김치호 씨는 이담에 정확한 수학 교수님이 되겠어요."
그러나 김치호는 수학 교수가 되지 못한다. 그날, 1960년 4월 19일 밤 열 시에 영원히 뜨지 못할 눈을 감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