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나는 아이들과 수업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흘긋 올려다본 하늘은 큰 비라도 올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이들을 급히 돌려보내고는 걱정스럽게 하늘을 보고 있는데 교실 뒷문이 삐그덕 열렸다. 검게 탄 주름 잡힌 얼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 아주머니를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쉽게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저...명덕이 엄만대유."
그제야 나는 그 여인이 방금 집으로 돌려보낸 명덕이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았다. 학기 초, 가정방문 때 명덕이네 집을 간 적이 있었다. 명덕이네는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산비탈에 살았는데 방 한 칸에 움막 한 칸이 전부였고 볏짚으로 가마니를 짜서 문을 해서 달 만큼 살림이 어려웠다. 명덕이 어머니는 명덕이 전학증을 떼러 왔다고 하셨다. 소양댐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날 참이라고 하셨다. 전학이란 말을 듣자 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학생을 떠나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방과후에 공부를 시켜도 불평 없이 잘 따라하던 명덕이에게 특히 정이 많이 들었는데... 교장 선생님께 결재를 받고 나서 나는 명덕이 어머니를 배웅하러 나섰다. 운동장으로 내려섰을 때는 빗물이 투둑투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마을로 향하는 지름길로 들어서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는데 갑자기 명덕이 어머니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는 무엇인가를 내 손에 꼭 쥐어 주는 것이었다. 명덕이 어머니는 화초 호박처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애원히듯 말했다.
"선생님, 이 손 절대로 펴지 마세유."
나는 당황했다. 내 손에 쥐어진 것이 꼭꼭 접힌 지폐라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그 당시 신문과 방송에서는 대도시 교사들의 촌지 문제가 한창 거론되고 있었다. 아치 모든 교사들이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처럼 떠들썩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눈길 속에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억울하기 짝이 없던 터였다. 나는 결국 그 자리까지 따라 나오며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는 내 자신이 답답해졌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선생님, 지발 부탁이어유. 내가 간 다음에 보세유. 꼭이유."
난 절대로 안 받겠다며 손을 뽑아 내려고 안간힘을 섰다. 하지만 명덕이 어머니는 금방 울음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얼굴로 찢어진 비닐우산도 채 펼치지 못하고 김장밭을 가로질러 도망치듯 달려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뿌연 빗줄기 속을 헤집고 도망치는 명덕이 어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을 돌리면서 천천히 손을 펼치는 순간, 나는 놀라고 말았다. 내 손바닥에는 겉 껍질이 벗겨져서 은박지만 남은 껌 한 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 만지작거려서 네 귀퉁이로 살이 다 나온... 나는지금까지도 그 껌을 내 비밀함에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에 찬바람이 들 때마다 그 껌을 꺼내 보면서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들 모자를 생각한다. (초등학교 교사)
가뭄과 태산붕알 - 강연균
"연균아, 너 불알 좀 보자!"
가뭄에 애타게 비를 기다리며 마을 앞 당산나무 밑 정자에 앉아서 하늘을 원망하시던 어른들이 어린 나를 보면 으레 하시던 말씀이다. 나는 유년 시절 별명이 '태산붕알'이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비가 올 무렵이면 부풀어 쇠불알처럼 커지곤 했기 때문이다. 동내 어른들은 나를 불러 세워 놓고 엿을 사준다느니 착하다느니 추켜세우면서 밑 터진 바지 밑으로 고추를 꺼내 불알 만져 보시곤 했다. 그것으로 비가 올까 안 올까 점쳐 보셨는데 그것이 용케도 몇번 맞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어느새 우리 동네 관상대가 되어 버린 셈이다. 그후 나는 불알을 헐값으로 꺼매 보여 주기가 싫어졌고, 귀찮기도 했지만 창피한 생각이 들어 오른들의 청을 별로 들어주지 않았다. 내가 예닐곱 살 때였던가. 가뭄이 극심해 모든 농작물이 바싹바싹 타들어가자 농부들의 한숨 섞인 탄식이 여름 하늘 뭉개구름 만큼이나 높아지고, 간밤에 자기 논에서 물을 빼내 갔다고 여기저기서 물싸움이 벌어지고, 이웃집끼리도 물꼬 싸움 때문에 말조차 않고 지내는 그런 흉흉한 때였다. 어린 나도 비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끔 골목 울타리 밑에 오줌을 냅다 깔겨대며 아랫도리를 슬그머니 내려다보며 확인하곤 했다. 하루는 정자나무 밑에서 하릴없이 동네 꼬맹이들과 흙놀이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도 골목에서 나를 만나면 그 넓디넓은 양팔을 떡 벌려 지나가지 못하게 붙들어 놓고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묻곤 하던 아저씨가 다가왔다. 그 아저씨는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연균이 이놈, 불알 한 번 만져 보자!"
나는 그 어른을 피해 잽싸게 도망을 쳤다. 하지만 몇 걸음 못 가서 나는 잡혔고, 잡히자마자 나는 무지막지한 욕을 목청이 찢어져라 퍼부어댔다. 어느새 지나가던 동네 어른들과 아이들이 구경거리가 생긴 것처럼 빙 둘러섰다.
"그래 연균아, 내가 이렇게 손 안댈 텐게 니가 한 본 만져 봐라."
아저씨는 쭈그려 앉으면서 사뭇 사정조로 나를 달랬다. 나는 마치 독안 든 쥐처럼 사면초가가 되었다. 나는 할 수 없이 어른들의 얼굴을 쳐다보며 슬그머니 아랫도리에 손을 넣었다. 초가집 처마 끝에 올라가 새 알을 꺼낼 때처럼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연균아, 어쩌냐 비 오것냐? 안 오것냐?"
아저씨는 마치 큰일이 난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나에게 물었다.
"비...오곳소. 비 온당께라우!"
나는 소리를 꽥 지르고 포위망을 빠져나와 집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날 해질 무렵 투두둑 마른 대지에 흙냄새를 뿌리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이내 흠뻑 비가 왔고 농토는 해갈이 되었다. 그후 그 아저씨는 허름한 약봉지를 소중히 싸 갖고 와 아버지에게 주면서 말했다.
"태산붕알 치료약은 이것이 잘 듣는다고 허대. 자네 아들놈 이것 한 번 먹여 보소."
쥐똥 같은 단방약 봉지였다. 어쨌든 그후 나는 비만 오려면 불알이 부어 오르던 그 병도 나았고, 세월은 이렇게 흘러 이제 그 어른은 만날 길이 없다.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