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스 목사는 몇 년 전에 덩굴장미를 정원의 모퉁이에 심었습니다. 덩굴장미는 노란 꽃을 풍성하게 맺는 종자로, 꽃이 필 것을 기대하고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꽃이 한 송이도 피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그는 그 장미를 사 온 원예농장에 가서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여 자주 물도 주고 볕을 쪼였으며 둘레의 흙을 기름지게 만들어서 가꾸어 준 결과 나무는 무성하게 잘 자랐으나 풍성한 노란 꽃은 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원예사는 바로 그런 원인들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종류의 장미들은 정원에서 제일 기름지지 못한 땅에 두어야 합니다. 비료를 주지도 말고 불필요한 가지는 사정없이 쳐내고 잘라버리세요. 그러면 꽃이 필 것입니다."
조이스는 당장에 달려가 원예사가 이야기한 대로 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안 있어 덩굴에서는 비길 데 없이 화려하고 커다란 노란색의 장미 꽃송이들이 수없이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을 통해 조이스는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노란 덩굴장미는 인간의 삶과 어쩌면 그렇게 같을까요.
곤경은 영혼의 아름다움을 향상시키며, 괴로움을 딛고 일어설 때 비로소 풍요로워집니다. 시련은 시련 당하는 자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지만 안락과 풍요와 갈채는 그들을 다만 황폐하게 할뿐입니다.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부자가 아니라, 신들이 주신 축복을 지혜롭게 이용할 줄 알며, 극심한 빈곤을 인내할 줄 아는 자이며, 죽음보다도 비천한 불명예를 무서워할 줄 알며, 사랑하는 벗이나 조국을 위하여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이다. (호라치우스)
내 아들을 은과 바꿀 수 없어요.
조선시대 숙종 때의 학자 김학성이 입신 출세하게 된 것은 가난을 고귀하게 여긴 어머니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일찍이 과부가 되어 가난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녀는 삯바느질을 하여 살림살이를 꾸려 가면서도 두 아들은 좋은 선생에게 보내어 공부하게 했습니다. 하루는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처마에서 물이 밑으로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물방울이 닿는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마치 땅 밑에서 쇠그릇이 울리는 소리와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호기심에 땅을 파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땅 속에는 큰 가마가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하얀 은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 큰 보화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남 모르게 흙으로 다시 그것을 묻어 버렸습니다. 이튿날 어머니는 오빠에게 부탁하여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 후 두 아들은 장성하여 과거에 급제, 학문을 인정받기에 이르렀고 그제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어머니와 두 아들은 아버지의 제사를 모셨습니다. 제삿날에 어머니는 오빠에게 말했습니다.
"남편을 잃은 후 나는 이 두 아이를 맡아 기르지 못할까 봐 아침, 저녁으로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의 학업도 진취되고 아버지의 뜻을 계승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이제 나는 이 세상을 떠나도 부끄럽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자신의 앞마당에서 발견한 은가마를 버린 사연을 덧붙여 말했습니다. 깜짝 놀란 오빠가 이유를 묻자 어머니는 다시 말했습니다.
"이유 없이 큰돈을 얻으면 반드시 의외의 재앙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땅히 고생해야 되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편안하게 되면 공부에 전력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돈을 낭비하는 습관만 생기고 마음이 점점 게을러져 쓸모없는 사람이 될 것이므로 이를 떠나는 것이 화를 떠나는 일인 줄 알아 기꺼이 가난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