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쓸쓸해지는 때가 있다. 마치 아무도 없는 벌판에 나혼자 서 있는 듯 막막한 느낌, 마치 고아가 된 기분이랄까. 그런 느낌은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서 일하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일이 매일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일 때 더욱 자주 찾아온다. 내가 이런 기분에 대해 얘기하면 친구 K는 말했다.
"마음이 공허해서 그런 거야. 연애라도 해봐."
하지만 원인이야 어쨌든 나는 내 감정을 점점 주체할 길이 없어져 한때는 불안하기조차 했다. 그런데 지난 크리스마스에 나는 K로부터 꽤 큼직하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 받았다. 풀어 보니 그 속에는 스케치북 한 권과 붓 네자루, 팔레트, 유화 물감, 자그만 캔버스 하나에 이젤까지 그림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이런 걸 왜 내게 주었을까? 스케치북을 펴보니 거기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림을 그려 보세요. 마음의 병이 나을 겁니다. K로부터.) 친구에게 하소연을 한 벌인 모양이었다. 붓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유화를 그린단 말인가? 나는 막막하고 미안하기조차 했다. 그대로 한 해를 넘긴 어느 날 마침 화방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나는 내 그림 도구 생각이 나서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한참 표구해 놓은 그림들을 보다가 화방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가 물었다.
"유화는 어렵지요?"
화방 주인이 말했다.
"왠걸요. 요새는 아마추어들이 유화를 많이 그려요. 초등학교 학생들도 그리는 걸요."
그날 저녁 나는 용기를 내어 그림 도구들을 펼쳐 놓았다.
그런 뒤로 나는 마음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점심 시간에는 가까운 화랑들을 순례하거니 화첩들을 사러 다니게 되었고, 내 딴에는 미술적 눈으로 세상을 음미하게 된 것이다. (회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