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기자와 돈은 인연이 멀다. 더구나 그 당시 내가 다니던 신문사는 경영이 곤란해서 월급을 잘 주지 못했다. 한두 달이면 모르지만 1년치나 밀리면 아무리 인심 좋던 시절이라 해도 도무지 배겨낼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하숙 생활을 했는데 밥값을 잘 낼 수가 없어서 그해 겨울을 신문사 숙직실에서 지낸 일이 있었다. 가장 큰 고통은 하루 세 끼 꼬박꼬박 밥을 사 먹어야 한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침만은 팥죽을 사 먹기로 했다. 아침에는 많은 밥보다도 가벼운 죽이 몸에 좋을 뿐더러 가장 값이 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팥죽집에 들렀다.
내가 다니던 팥죽집은 신문사 바로 맞은편 골목에 있었는데,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 방 한 칸을 얻어서 할머니 한 분이 쓸쓸히 살고 있었다. 너무나 고독한 탓인지 아니면 인정이 많아서인지 누구에게나 친절히 대했으며 특히 내게는 자신의 식구처럼 애정을 표시했다. 돈이 없을 때도 흔쾌히 외상을 주었고, 외상 값이 밀려서 잘 가지 못하면 일부러 신문사까지 찾아와 왜 오지 않느냐고 나무라기도 했다. 그때 할머니의 말이 인상적이었다.
"늙은 것이 무얼 알까마는 당신은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인데 그까짓 팥죽값이 뭐란 말이오. 팥죽쯤은 거저 드려도 좋으니 계속 와주시오."
나는 도리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대꾸를 못하고 그 마음씨가 고마워서 돈이 있으나 없으나 매일같이 팥죽집에를 다녔다. 몇 달이 지난 뒤 지방에 특파원으로 갔다가 오랜만에 팥죽집에 들렀더니 문 앞에 종이로 만든 흰 초롱이 달리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팥죽 할머니가 갑자기 병이 나서 바로 그 전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어서 동네 사람들이 돈을 걷어 장례를 치러 주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 할머니가 불쌍해서 그날 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상가에서 지내고 이튿날 신문사로 돌아와 사장실 문을 두드렸다. 신세를 태산같이 진 팥죽 할머니의 마지막 길에 그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사장은 신문사를 경영하느라고 전 재산을 탕진한 사람이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사장은 돈을 줄 수가 없었던지 손목에 차고 있던 금시계를 내놓았다. 그거라도 잡혀서 장례비에 보태라는 뜻이었다. 이튿날 팥죽 할머니의 장례식에서는 자식도 아니오, 친척도 아닌 내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