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어머니는 늘 이른 새벽이면 큰 가마솥에 보리밥을 앉히고 그 위에 흰쌀이 섞이지 않도록 조금 얹어서 밥을 하셨다. 그 밥으로 어머니는 삼남매의 도시락을 싸서 부뚜막에 단정히 올려 놓고 새벽 시장에 과일을 팔러 가셨다. 그런데 그날은 너무 바쁘셨는지 도시락 뚜껑을 미처 닫아 놓지 않고 나가셨다. 세 개의 도시락을 보니 오빠 것은 대학생이라고 흰 쌀밥이고, 여동생 것은 수줍음 많이 탄다고 그랬는지 약간 쌀밥이고, 내 도시락은 온통 시커먼 보리밥에 쌀알이 몇 개 보일 정도였다. 나는 무척 서운하고 속상했다. 같은 반 학생들의 웃음 섞인 눈빛이 날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난 도시락을 잊고 안 가져간 것처럼 예쁘게 손수건에 싸서 책상 위에 올려 놓고는 촉촉이 물이 올라 미끈거리는 오월의 논두렁을 정신없이 달려 학교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리곤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특유의 넉살로 친구들과 점심을 나눠 먹었다. 오후 수업이 시작되려면 10여 분 정도 있어야 했는데 누군가 나에게 너희 어머니가 오셨다고 전해 주었다. 나가 보니 키 작은 엄마가 도시락을 들고 서 계셨다.
"도시락을 왜 빼놓고 갔니? 배가 얼마나 고프니?"
어머니는 도시락을 건네주시며 살짝 말씀하셨다.
"너 창피할까 봐 과일 함지박은 수위실 옆에 감춰 놓고 왔다."
그리고 나서 어머니는 황급히 떠나가셨다. 조그맣게 쪽찌어진 어머니의 뒷머리를 보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서 차 오르는 뜨거운 어떤 것을 느꼈다. 오후 첫 시간 수업을 빼먹고 난 교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촉촉이 젓은 흙먼지 위에 가느다란 망초 대가 파랗게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그 풀과 얘기를 했다. 난 아주 나쁜 계집애라고. 어머니의 사랑을 배신한 벌이라 생각하며 나는 보리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어머니도 내가 왜 도시락을 안 가져갔는지 아시면서 짐짓 모른 척해 주셨을 것이다. 훗날 난 그 도시락 통을 시집올 때 가지고 왔다.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아 여드름이 퐁퐁 솟은 하얀 양은 도시락을 꺼내 볼 때마다 과일 장수를 하며 자식을 키워 내신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