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사랑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주진 못한다. 하지만 사랑은 나이로부터 당신을 보호해 준다. -쟌느 모로우
아내는 나보다 일찍 세상을 떴다. 1931년 내 나이 서른세 살일 때 당시 스물 두 살인 아내와 결혼해 꼭 30년을 살다가 죽은 것이다. 죽던 날 조문 온 친구에게 내가 말했다. "아내가 죽은 후에 내가 남은 세상을 살아갈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극도의 놀라움, 슬픔, 실망에서 나온 말이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아내는 행복과 불행을 같이해 온 한 몸과 같다. 옛사람이 부부일체라고 한 말은 당연하다. 그런 중에도 나는 아내가 좀더 유능한 사람에게 시집갔더라면 더 낫게 살고 행복을 누릴 것을, 나 같은 무능한 사람에게 와서 고생만 하다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아내가 한없이 가엾고 불쌍하다. 아내는 일평생을 나를 위해 희생했다. 여관으로 떠돌아 다니던 내가 집을 마련하고 농토를 사들이며 조상의 선산을 보존하게 된 것은 모두 아내 덕이다. 죽기 전 10년은 내가 국회의원 입후보를 해서 두 번에 걸쳐 1,200만 환의 빛을 졌었는데, 그 빚을 다 갚고도 450만 환을 저축해 그가 죽던 해에 그 돈으로 당선 되었으니, 그 정성은 깊은 잠 들기 전에는 잊지 못한다. 이러느라고 그는 나들이 옷 한 가지도 똑똑히 못해 입고, 내복도 노닥노닥 기워 입어서 앉으려면 엉덩이가 받쳐 아프다고 했다.
아내가 죽은 후 얼마 동안, 나는 너무 실망해 몇 달 동안 몸져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정성을 쏟던 일을 성취하는 것이 그의 혼이나마 위로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기운을 차려 선거전에 뛰어들었으며 마침내 당선을 했다. 나는 맨 먼저 당선 통지서와 함께 꽃을 한 아름 사 갖고 그의 무덤을 찾아가 무덤 전체를 꽃으로 덮고 울고 또 울었다. 나는 평소에 아내를 믿었으므로 월급을 타면 봉투째로 갖다 맡기고, 용돈은 아침에 나올 때 타 갖고 나왔었다. 종일 직장에서 피곤했던 몸으로 돌아가면 아내는 집 어귀 가게에 나와서 기다리다가 둘이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이것을 본 이웃 할머니가 말하곤 했다.
"내외분이 꼭 같이 다니시는구먼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 집은 나 혼자 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둘이 같이 번답니다."
이 '같이 번다'는 말 속에는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지금과는 세상이 다르지만, 아내는 머리를 곱게 빗어서 쪽을 쪘었다. 새빨간 댕기를 넣어 쪽을 찌면서 "댕기는 남편이라는데..."하면서, 나 늙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서글퍼하더니 먼저 갔다. 밤이면 잠자리를 봐주고, 덮은 이불의 내 어깨 있는 데를 바람 들어가지 말라고 꼭꼭 눌러 주던 것이 잊혀지지 않는다. 젊은 사람들 중에는 남녀간의 연애를 높이 평가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나는 연애가 시냇물 같다면 부부애는 헤아릴 수 없이 넓고 깊은 바다 같다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