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신탕을 먹는다. 그러나 혹시 어머니 앞에서 보신탕 이야기가 나오면
시치미를 뚝 떼고 전혀 안 먹는 체한다.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이시다. 매일 아침 염주를 헤아리며 염불을 하신다. 그리고 낮으로는 심심하면
관음경을 읽으신다. 절에 자주 가시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게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두터운 어머니께서 내가 개고기를 먹는다는 걸 아시면
큰일이다. 불교에 있어서 개고기는 절대 금기인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취중에 "아, 그놈의 보신탕 맛 좋더라" 하고 입 밖에 냈던
모양이다. 어머니의 노기는 대단하셨다. 노기라기보다 슬픔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맨날 운수가 없는 것이며, 지금까지
집 한 칸 장만하지 못한 것이 다 왜 그런지 아느냐며, 집 없는 것까지 보신탕 탓으로 돌리시는 것이었다. 그런 일이 있는 뒤부터
나는 어머니 앞에선 보신탕 배격주의자인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내게 처음으로 개고기를 먹인 사람이 다름아닌 어머니라는
사실이다. 어머니가 손수 개고기를 솥에 고아서 먹으라고 주셨던 것이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국민 방위군에 나갔다가 돌아온 나는 반병신이
되어 있었다. 국민 방위군은 1.4후퇴 때 조직된 반군 반민의, 말하자면 예비 군대였다. 일명 '보따리 부대'라고도 했었다. 제각기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국민 방위군에 나갔다가 나는 팔 하나를 전혀 못 쓰는 불구자 비슷한 상태가 되어 귀향했다. 다친 일이
없는데도, 어떻게 된 셈인지 팔 하나가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그냥 밑으로 가만히 내리고만 있어도 쩌릿쩌릿하고 뻐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끼를 주워 가지고 붕대처럼 묶어 팔을 목에 걸고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다친 일이 없다면 그건 영양 부족 탓이라는 게 이웃
사람들의 말이었다. 그런 데는 무엇보다도 개고기가 최고라고 했다. 아닌게아니라 나는 팔 하나를 못 쓸 뿐 아니라, 여윌 대로 여위어서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서슴없이 개 한 마리를 사시는 것이었다. 그때 역시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도이셨다. 보신탕을
먹을 때마다 나는 그때 일이 생각난다. 그것을 먹고 희한하게도 팔의 기능을 회복했으며, 몰골도 차츰 사람같이 되어 갔다. 어머니께서 지금은
보신탕이라고 하면 질겁을 하시지만, 만일 자식들 가운데 누가 중병에라도 걸려서 그 병에는 개고기가 최고라고 한다면 20년 전 그때와 마찬가지로
거침없이 또 개고기를 구하러 나서실 것이다. "관세음보살!" 하면서 말이다. 모성은 이렇게 신심에 앞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