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것들은 말이 없다 내 사랑하는 여자도 말이 없고 나는 너무 많은 사랑을 하다가 쓰러져 겨울 사내로 말이 없고
깊은 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듯 진실로 사랑하는 가슴은 너무 많은 말과 너무 많은 사연과 너무 많은 눈물이 있어 말없이 흘러가는 것
그래도 꼭 한 마디 품고 가야 할 말이 있어 나 이렇게 새벽 강가에서 사랑의 침묵을 듣고 있을 뿐
짝사랑의 상처
벌교중학교 1학년 때였던가 나는 여학교 퀸으로 뽑히던 글 잘 쓰고 눈빛이 슬퍼 보이던 그 애를 짝사랑했는데 부끄럼을 많이 타서 편지로만 무지 몸살을 앓았는데
읍내를 꽉 잡고 누비던 어깨 큰 선배들이 그 애를 자기한테 인수인계하라고 해서 밤중에 공원으로 불려가 싸움이 붙어 엄청 깨져버려 지금도 머리에 짝사랑의 흉터가 챙피하게 남았는데
그때 선배들한테 목을 밟힌 채 내가 한 말은 그 여자애 마음을 가져와 보라고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힘으로 주고받냐고 어떻게 내 것도 아닌 사랑을 내 것인 양 인수인계하냐고 사랑의 방향은 오직 그녀 마음 안에 들어 있는 거라고......
지금도 누군가 나에게 힘으로, 돈으로 내 마음을 바꾸라고 강제할 때면 나는 문득 25년 전의 그 사랑싸움이 생각나는 것이다
아, 그때 피투성이로 밟힌 채 쳐다보던 그 밤하늘엔 어찌나 별이 맑고 곱던지 풀벌레 소리는 왜 그리 서럽게 환하던지 그래서였던가 나는 정신을 잃는 순간까지 단호하게 말했었지
어떻게 사랑을 힘으로 주고받냐고 어떻게 내 것도 아닌 그녀 마음을 우리끼리 주고받냐고 어떻게 그녀 마음을 함부로 빼앗느냐고
그래, 지금도 난 그래, 어떻게 양심을 강제로 바꾸려하냐고 어떻게 민심을 힘으로 판단하냐고 어떻게 미래를 돈으로 가지려하냐고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 것들을 어떻게 힘으로 빼앗아가겠다는 것인지 그때나 지금이나 나로서는 이상한 생각이다
사랑의 상처를 다시 내 온몸으로 수놓을지라도 나로서는 정말 그 이상하고 이상한 생각에 굽힐 수 없는 것이다.
가을에 떠나다
이 가을에 나는 쓰러져 우네
다시 겨울은 오는데 저 겨울산을 무엇으로 혼자 넘나
너와 함께해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젖은 눈으로 지켜봐 주던 너도 이제 없는데
침묵의 불덩어리 품고 언 살 터진 겨울 사내로
무엇으로 혼자 넘나 저 겨울산
박노해 - 1957년 전남 함평에서 출생했으며 본명은 박기평, 세례명은 가스발이다. 선린상고 야간부를 졸업하고 섬유.금속 노동자로 일했으며, 버스회사에 취업하여 운수노동운동을 하다 해고당하고 1985년 결성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서 활동했다. 1989년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시집 '노동의 새벽', '참된 시작'과 산문집 '사람만이 희망이다'가 있다. 1991년 구속되어 국가보안법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중 1998년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