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속성 광야 수업.' 내 유학 생활은 그렇게 정리할 수 있을 거 같다. 동경하는 마음으로 떠났지만 막상 가 보니 내가 꿈꾸던 생활은 하루 만에 끝이었다.
연극 워크숍을 시작한 날, 첫 포기를 했다. 한국어로 외워서 연기하기도 쉽지 않은데 영어로 연기를 하자니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다. 게다가 연출가는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유독 나한테만 질문을 던지더니 어느 순간 내 시원찮은 영어가 답답했 는지 그냥 한국말로 하라는 것이다. 내 말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느낄 수 있다고. 결국 난 한국말로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해 버렸다. 속으론 '어떠냐. 답답하지? 너희가 내 맘을 알아? '하면서. 그런데 연출가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기분이었다. “그래. 네가 얘기한 것 처럼 하면 돼. 그냥 그렇게 해. 네 생각이 맞으니까. 근데 포기는 하지 마. 네가 포기하는 게 느껴졌어.”
그랬다. 소통에 있어서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의미 전달 수단이 능숙하지 못해 불편할 뿐 서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대신 난 다른 것을 포기했다. 내가 해왔던 방식과 방법들을 말이다. 그걸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인정 했다. '그래 난 완벽하지 못해. 그래서 불편하지만 불편하려고 여기 온 거잖아. 자꾸 자꾸 포기하자.'거기서부터 나의 적응은 시작됐다.
한번은 이런 날이 있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영어에 알아들은 척 웃음을 날리느라 볼에 경련이 일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던 무렵이었다. 밥 먹고 수다 떠는 순간마저 곤욕인데, 친구들이 자꾸 펍(pub)에 가자고 졸랐다. 술자리에서 나는 말했다. “너희 하는 얘기 솔직히 잘 모르겠어. 너희가 한국말로 해 봐.” 솔직함만 한 좋은 술(?)이 없다더니, 그날 처음으로 친구들과 진짜 웃을 수 있었다.
일상 속에서의 불편함은 수업을 통해서, 교제를 통해서, 그리고 낯선 환경을 통해서 고통 속에 만들어지는 근육처럼 내 안에 적응한다. 그래, 그것은 '극복'이라는 말보다 '적응'이란 단어가 어울린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 더 능숙해지는 것이다. 그 시간이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낯선 곳일수록 힘을 빼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다. 몸에 힘을 주고 있으면 휘다가 부러지고 만다. 힘을 빼고 상황에 몸을 맡기듯 살아야 한다. 모세의 40년 광야 생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