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피어나는 꽃들 앞에서 누군들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겠어요. 벌들처럼 잉잉대며 한나절 쏘다니는 수밖에요. 저도 오늘은 모처럼 산책도 하고 봄나물도 뜯으며 주말다운 주말을 보냈답니다. 벚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던 꽃잎 몇 점이 어깨에 묻어 왔지요. 아름다운 것들은 이렇듯 작고 가볍고 덧없는 모양인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난 번 편지에서 들려주신 정조의 얘기는 강한 자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드문 예인 것 같아요. 신하의 시를 읽고 그 문맥을 헤아려 개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임금이라……. 정치에 대해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저도 이런 정치라면 믿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른 일화를 떠올려 보아도 정조는 배우고 대화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행복한 사람이었던 듯합니다.
아주 오래 전 일주일에 한 번씩 한문을 배우러 다닌 적이 있는데요. 그 모임에서 《시경》과 함께 《시경강의》라는 책을 강독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경강의》는 정조가 《시경》을 공부하면서 의문을 가졌던 800여 개의 조목에 대해 정약용이 강의 형식으로 답한 내용을 묶은 방대한 책이에요. 그때만 해도 번역이 되어 있지 않아 떠듬떠듬 원문을 읽어 내려가야 했지만, 다산(茶山)을 전공한 학자들이 오랫동안 공들여 번역해서 작년에 출간이 되었지요. 정조와 다산이 《시경》의 단어나 구절을 놓고 벌이는 팽팽한 논박은 고수들의 바둑내기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흥미로웠지요.
이 책이 씌어지게 된 동기도 재미있어요. 창덕궁에서 활쏘기대회가 열렸는데 다산은 단 한 발도 맞추지 못했다고 해요. 정조는 그 벌로 자신이 작성한 질문지 뭉치를 주며 40일 안에 답을 써 올리라고 명했지요. 800개가 넘는 질문에 일일이 답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다산은 간신히 20일 더 말미를 얻어 그 책을 썼다고 해요. 정조의 학구열도, 다산의 학식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시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다스리는 지혜를 얻으려 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정조와 다산이 힘을 합해 이룬 일 중에는 수원성을 쌓은 것도 빼놓을 수 없지요. 다산은 거중기와 유형거를 만들어 사람의 힘을 덜게 했고 정조는 인부들의 노임을 후하게 쳐 주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해요. 정조가 세세한 것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고 한 신하가 “적을 막는 성이 튼튼하면 됐지 아름다워서 무엇하느냐.”고 묻자, 정조는 “아름다움이 곧 힘”이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지요. 아름다운 정신이 어떤 칼이나 창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선정(善政)을 베풀 수 있었을 거예요.
어쩌다 보니 정조 예찬론이 길어졌네요. 날이 갈수록 아름다운 정치가를 만나기 어렵다는 절망감과 그에 대한 기다림이 간절해지기 때문이겠지요. 거리마다 식당마다 명함을 들고 다니며 선거전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이기도 하고요. “강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 되어 버린 세상이니,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저토록 애를 쓰는 것인가 씁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아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이나마 평화로울 수 있는 게 아닌지……. 어수선한 시절에 평화, 라는 말이 유난히 마음을 울리고 지나갑니다. 저 꽃들에게 깃들어 있는 아름다움과 평화가 고통과 슬픔에 잠겨 있는 사람들에게도 함께 하기를.
광주에서 나희덕
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에서 나서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김수영 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