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따뜻해.”누군가 쭈글쭈글한 볼때기를 쓸어 보고, 이불깃을 어깨까지 올린 뒤 다독거린다. 그 손길이 따뜻해 눈을 뜨고 싶지 않다. 팔순이 넘은 유 노인은 이 기분을 즐기며 혼곤히 잠 속으로 빠져든다.잠시 뒤“톡!”소리에 주위가 조용해지고, 어둠과 적막이 더해진다. 이제야 아들이 들어왔나 보다. 마누라가 집을 비우면 아들을 기다리다 잠든 유 노인 방에 들어와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을 끄는 것은 아들 몫이다.아들은 출퇴근할 때면 아무리 이르거나 늦어도 꼬박꼬박 부모님 방에 들러 안부하고, 잠든 듯하면 깰까 조심한다. 고맙고 든든하지만 겉으로는 심드렁하게 반응한다.아들에 비해 대범한 며느리는 제 일을 깔끔하게 해내지만 대소사에 까다롭기로 소문난 유 노인에게는 조심이 지나쳐 늘 일정한 거리를 둔다. 그게 불만이라면 불만이지만, 탓할 일도 아니다.고등학생인 두 손자 녀석은 한 달에 두어 번 유 노인과 사우나 나들이를 한다. 서툰 솜씨로 씻기고, 옷 입혀 드리고, 계단에서는 업거나 안아서 모신다. 그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더 감동하는데, 녀석들은 쑥스러워 쥐구멍을 찾는다.유 노인이 십여 일 넘는 삼복더위 속에서 한기에 시달린 적 있다. 아들 내외 덕에 너른 아파트 볕 잘 드는 방에서 배부르고 등 따습게 지내는데도 말이다. 마침 기도원에 간 마누라도 전 같으면 길어야 이삼 일인데 이번에는 열흘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삼 일을 넘기자 화가 나더니, 오 일이 지나니 걱정이 태산이다. 방정이라 눙쳐 봐도 불길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데, 태평한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괘씸하기 짝이 없다.참다못한 유 노인이 며느리를 불러 놓고 호통치려는데 말이 안 나온다. 그때 눈치 9단인 며느리가 먼저 미소 지으며 말한다.“어머님 오늘 오실 거예요. 사실 그동안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완쾌돼서 퇴원하세요.”유 노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목소리가 부드러워진다.“그랬구나. 그동안 애썼다.”박세경님| 수필가《좋은생각》2010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