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 년 8월 25일 낮 12시 30분, 서울대학 병원에서는 여느 때와는 다른 감동의 집도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입을 굳게 다물고 눈물을 삼키며 비장한 각오로 집도하고 있는 교수들은 고인의 뜻에 따라 안구를 떼내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고, 암세포가 퍼진 것으로 밝혀진 간, 폐, 심장 등의 장기들은 병리학 교실의 연구자료로 쓰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의과대학에 시체를 기증키로 했으니 불의의 사망시 대학병원쪽에 연락 바람'이라는 내용의 유언서를 신분증과 함께 가지고 다닌 서울대 이광호 교수는 이 날 오전 10시 급성 신장암으로 운명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뜻에 따라, 장남이 자리한 가운데, 후학들을 위하여 몸을 바치고 있는 살신성의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평생을 해부학 발전에 몸바쳐 오다 최근 의과대학 해부실험용 시체의 공급이 급격히 줄어들어 실습에 차질을 빚게 되자 지난 1월 서울 지역 9개 의과대학 해부학과 교수 34 명과 함께 시신을 해부용으로 내놓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로 인한 이 날의 숭고한 집도는 허준이 '동의보감'에서 의술 발전을 위해 남긴 스승의 시신을 눈물과 함께 해부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에게 참 삶의 고귀한 가치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기증 의사를 듣고 사체를 손상시키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어긋날 뿐 아니라,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욕심이 들어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평생을 바쳐온 의학계의 발전에 죽어서까지 이바지하겠다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습니다."
막내따님의 너무나도 소박하고 애틋한 이야기가 마치 가까운 이웃에서 들리는 듯합니다만, 죽어서까지 남을 위하고, 죽어서까지 할 일을 하는 이들의 용기와 귀한 생각을 우리는 얼마나 닮아가고 있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이분들에게 영원히 갚기 힘든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