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 그믐도 며칠 남지 않은 어느 추운 날, '맑은물 목욕탕'의 유리문을 열고 80살쯤 된 할머니를 업은 중년의 아주머니가 들어왔다. "저런 착한 며느리가 없지. 아니, 며느리가 아니고 딸인가?" 벌써 여러번 보아 온 광경이지만 주인은 그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숱이 없는 엉성한 은빛 머리칼, 앙상하게 드러난 갈비뼈, 할머니는 몹시 쇠잔해 보였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중년 여인은 샤워기를 틀어 노인의 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겼다. 조심조심 머리를 감기고 입안에 손가락을 넣어 양치질까지 해주더니 밖으로 나와 옷을 입히고 편안히 바닥에 눕혀 주었다. 그리고 다시 욕탕 안으로 들어와 샤워를 하자 옆에 있던 여자가 아는 체를 했다. 여인이 목욕을 하는둥 마는둥 금새 밖으로 나가자 몇몇 여자들이 인사를 건네던 여인에게 물었다.
"잘 아시는 분인가 보죠?" "그럼요. 이웃인걸요. 할머니는 꼭대기 무허가 판자집에 혼자 사시는 분이구요. 할머니 아들이 십년전 교통사고로 죽자 며느리가 집을 나갔대요. 아까 그 아주머니도 식당일을 다니면서 어렵게 사는데 수시로 할머니를 보살펴 드린다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목욕탕까지 업고 오다니, 딸이라도 하기 어려운 일을..."
여자들은 놀라서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탈의실로 나온 중년 여인은 노인의 스웨터 단추를 꼼꼼히 채우더니 다시 등에 업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카운터 앞을 지나는데 주인 남자가 등뒤에서 불렀다.
"아주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오래오래 사십시오." "고맙습니다."
중년 여인이 총총히 문을 나서자 주인 남자는 기분이 좋아졌다. 뽀얀 유리문 너머로 어느샌가 하얀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