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어느 겨울의 일이다. 쉬는 시간에 운동장으로 나와서 몇몇의 친구들과 양지 쪽에 옹기종기 모여 떠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은 너무 멀고 날씨도 추워 움직이기 싫었던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탱자나무 울타리에 실례를 했다. 누가 볼세라 얼른 일을 마치고 왁자지껄 떠드는 친구들 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잠시 후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체육 선생님이 상기된 얼굴로 헐레벌떡 우리를 향해 뛰어오셨다. 선생님은 내옆에 서 있던 친구의 멱살을 움켜잡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아, 어디다가 오줌을 싸느냐! 거기가화장실이더냐."
친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얼른 내 눈치픞 살피면서 말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제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누구냐. 이 두 눈으로 보았는데 거짓말을 하다니."
그 순간 선생님의 손이 하늘로 올라가더니 '철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화가 난 선생님이 기어이 친구의 뺨을 때리고 만 것이었다. 친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친구의 양볼에는 벌겋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그때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 친구의 볼만큼이나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사쥐고 교실로 뛰어들어가면서 나는 뒤따라오는 친구를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이 사건을 이십 년 이상 가슴속에 묻어 두었다. 그 친구와는 계속 만나 왔으나 한번도 그 일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친구를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너무나 불편하고 미안했다. 그러던 어느날 마음을 다져먹고 친구에게 사과를 했다. 그런데 친구는 그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겠다며 손을 저었다. 그날 밤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불현 듯 이십여 년 전 선생님에게 멱살을 잡힌 그 친구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 순간 친구는 그 때의 일을 누구보다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