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는 언니와 나, 딸 둘뿐인 우리에게 사촌 오빠들이 입던 옷을 물려입게 하셨다. 가끔씩 겉옷은 물론 속옷도 물려 입었는데 어린 우리는 별다른 불평없이 엄마말을 잘 들었다. 그런데 삼학년 신체검사 때의 일이다. 그 날도 여느때처럼 나는 남자 속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남자애들이 복도로 나간 뒤, 나는 웃옷을 벗으려다가 그만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친구들의 속옷 모양이 내가 입었던 것과 달랐던 것이다. 그때까지 남자와 여자의 속옷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나는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차마 웃옷을 벗을 수가 없었다. 내 차례가 되었지만 나는 막무가내로 옷을 벗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담임 선생님은 그런 나를 달래고, 혼내시다가 결국 지친 나머지 맨 나중에 검사 받으라고 하셨다. 그때 나는 나에게 남자 속옷을 입힌 엄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또 아무 잘못없는 담임선생님이 괜히 미웠다. 한쪽에서 울먹이고 있는 내게 먼저 검사를 마친 단짝 미경이가 다가왔다. 나는 미경이에게만 속상한 내 마음을 살짝 털어놓았다. "내가 입고 있는 속옷은 남자거야." 그러자 미경이가 얼른 나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나는 검사가 끝났으니까 내 속옷이랑 바꿔 입자. 빨리." 미경이 덕분에 나는 반 친구들에게 놀림 당하는 일 없이 무사히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꼭 속옷을 선물한다. 속옷을 고를 때마다 미경이를 생각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