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부터 장롱 앞에 앉아 계신 어머니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처음엔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 그런데 보고 있던 쇼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도 어머니는 여전히 장롱 앞에 앉아 계셨다.
"밥 안 주능교?"
대뜸 던진 내 말에도 어머니는 그저 "응? 그래 조금만 있어봐라" 하셨다. 그제서야 빨래를 정리하시나보다 하던 나의 무관심이 호기심으로 변했다.
"뭐하는데 아까부터 내내 그라고 있능교?"
슬그머니 다가앉은 나를 보시던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정리하던 서랍 속에서 수건 하나를 꺼내 보이셨다.
"이게 뭔지 아나?"
내가 보기엔 그저 노란빛이 바랜 낡은 수건이었다.
"뭔데요? 수건 아인교?" 했더니 "그래 너 처음 나아서 싼 수건이다 이놈아" 하셨다.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어머니의 말씀에 점 쑥스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수건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뒤집어도 보았다. 수건 속에 싸인 나를 상상해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조금 뒤 나는 그 서랍 속에서 쏟아져 나온 수건들에 대한 갖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날짜가 적혀 있고 무슨무슨 기념이라는 글자가 적힌 수건들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마치 어머니의 지난 일기장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와 처음 나들이 나갔을 때 산 수건이라든지 내가 수학여행때 사다 드린 수건, 또 누군가 선물로 준 수건 등등. 수건 하나하나를 보며 그때 있었던 일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해 내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조정래 씨가 쓴 수건의 맵시에 대한 글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어머님들의 수건 쓴 모습을 우리는 참 많이도 보았던 것 같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수건을 쓰고 후끈거리는 밭이랑에 앉아 호미질을 하는 모습이라든지 빨래터에서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동여매고 앉아 빨래 방망이질을 하시던 모습들은 어릴 때 자주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 어머님들은 쓰시던 그 수건으로 훌쩍거리는 우리 아이들의 코도 풀어 주고 맛난 과일을 깨끗하게 닥아도 주고 무슨 설움으로 부엌 부뚜막에 앉아 흐르는 눈물을 찍어도 내었으리라 생각하면 보잘 것 없는 그 수건에도 꽤 정이 간다."
문득, 지난 가을 집 앞의 대추나무를 털던 날에 수건을 머리에 쓴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무에 모른 나는 가지가 휘어지게 열린 대추를 털면서 일부러 어머니가 계신쪽으로 가지를 마구 흔들었다. 흰 수건을 쓴 어머니의 머리위로 떨어지던 빨간 대추들..... 내 심술을 알기나 하신 듯 "이놈아!" 하시며 빙그레 웃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아마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저녁상을 차리려고 나가신 어머니의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를 들르며 나는 장롱 앞에 다시 앉아 어머니의 서랍을 몰래 열어 보았다. 그 속엔 어머니의 추억이 묻은 수건들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이것들도 어머니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소품들이라 생각하니 웬지 코끝이 찡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