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박완서편"
여류 소설가. 경기도 출생. 서울대 문리대 중퇴. 1970년에 장편 소설 "나목"으로 문단에 나온 후 장편 "휘청거리는 오후" 등으로 일약 각광을 받아, 가장 설득력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로 평판을 얻었다. 감각적인 묘사가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분석력으로 지목되고 있다.
소도구로 쓰인 결혼 사진
비가 올 것 같은 날이었다. 마침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날이라 나는 부부 동반한 2박 3일 정도의 짧은 여행을 계획하고 나선 길이었다. 실로 얼마만인지도 모르게 오래간만에 우리는 완행 3등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골에 내리는 비는 도시에 내리는 비와 그 풍취가 전연 다르다. 빗속에 바라보는 봄의 농촌은 싱그럽고 산뜻하고 흥겨워 보였다. 물을 흠뻑 먹은 땅이 검고 부드럽게 보이는 들판으로 도랑물이 흐르는 게 가을 들판 못지 않게 풍요로워 보였다. 문자 그대로 감우로구나 싶었다. 들과 풀과 나무와 내와 배꽃, 복숭아꽃이 달디 달게 목을 축이고 무럭무럭 자라는 게 보이는 듯했다. 얼마나 좋은 고장인가 이 땅은, 나는 제법 감동까지 했다. 그런데 문제는 기차 속이었다. 쉴새없이 장사꾼이 드나들며 연설을 해댄다. 백 원에 자그마치 빗이 다섯 개에 칫솔을 세 개나 껴 주겠다는 장수서부터 바늘장수, 책장수, 사이다, 콜라, 사과, 삶은 계란, 김밥, 호두과자 장수들이 서로 다투어 목청을 돋우고, 물건을 떠맡기고 했다.
나중에는 한푼 보태 달라는 사람까지 찻간에 들어서자마자 유창하게 일장의 연설을 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골병이 들고 회사까지 해고 당해 제 입 한 입 굶는 건 문제도 아니지만 나섰으니 신사 숙녀 여러분의 동정을 바랄 따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서 개별적으로 승객 한 사람 한사람에게 구걸 시작했다. 차마 거지라고 부를 수 없게 의젓하고 단정한 차림이었다. 그러나 구걸하는 경우 단정한 옷차림이란 눈에 거슬리면, 거슬렸지 보탬이 되지는 않는 법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좀 이상한 걸 갖고 다니고 있었다. 꾸벅 절을 하고는 무슨 증명서를 꺼내 보이듯이 그걸 꺼내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걸 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이 보이는 거나를 똑똑히 보면 구걸에 응하게 될 것 같아 겁이 나는 것처럼 누구나 그 사람 쪽은 거들떠도 안 보고 차창 밖만 열심히 내다봤다. 나는 그게 뭔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내 앞에 그가 오거든 그게 뭔가 똑똑히 봐 두리라 벼르고 그가 오기를 기다렸다. 뜻밖에도 그건 낡은 결혼사진이었다. 족두리 쓰고 연지 찍고 다소곳이 서 있는 신부 옆에 사모 관대의 사랑이 의젓하게 서 있는 촌스럽고 낡은 구식 결혼 사진이었다. 그리고 사진 속의 신랑은 지금 구걸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이었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걸 보여 주며 구걸을 하는 것일까, 나는 이상해하면서도 어느만큼은 감동 같은 걸 하고 있었다. 그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고 결혼을 했다. 천지신명께 백 년 해로를 맹세했고 친척 친구들에게 앞날을 축복받으며 착한 여자의 지아비가 되었고, 지금 이 구걸도 그 무겁고 무서운 지아비 노릇이다 하는 생각이 뭉클하니 내 심장 언저리를 뜨겁게 했다.
웬일인지 이 결혼 사진도 구걸 행각의 소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약고 똑똑한 생각은 안 했다. 나는 구걸하는 사람에게 베풀기에는 좀 많은 돈을 꺼내서 얼른 그 사람의 주머니에 꾸겨 넣었다. 남편이 알까 봐, 또 딴 승객들이 눈치챌까 봐, 나쁜 짓이라도 하듯이 몰래 재빠르게 그 짓을 하고, 하고 나서도 얼굴을 붉혔다. 아마 그 날이 내 결혼 기념일이어서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의문이 안 풀리는 건 그가 왜 하필 결혼 사진을 꺼내 보이며 구걸할 생각을 했을까 하는 거다. 내가 보기엔 그게 조금도 구걸에 도움을 주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다. 어쩌면 결혼의 의미를 남보다 더 잘, 더 많이 알고 있었음이 아닐까. 비 오는 날 있었던, 사건이랄 것도 없는 몇 가지 얘기를 적어 놓고 보니 문득 서글프다. 빗속에서 같이 받은 우산이 인연으로 싹튼 로맨스가 한 컷쯤 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게 없는 걸 어찌하랴. 이래 저래 40대의 비 오는 날의 사건은 재미없을 수밖에 없나 보다.
떳떳한 가난뱅이
뭐는 몇십 %가 올랐고, 뭐는 몇십%가 장차 오를 거라는 소식을 거의 매일 들으면서 산다. 몇 %가 아니라 꼭 몇십% 씩이나 말이다 이제 정말 못 살겠다는 상투적인 비명을 지르기도 이젠 정말 싫다. 듣는 쪽에서도 엄살 좀 작작 떨라고, 밤낮 못 살겠다며 여지껏 잘만 살았지 않느냐고 시큰둥하게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백성들의 생활력이 질기다는 게 모멸에 해당하는 일인지 찬탄에 해당하는 일인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질기다는 것만 믿고 너무 가혹하게 당하고만 있는 것 같아 뭉클 억울해진다. 더 억울한 건 물가가 오를 때마다 상대적으로 사람값의 하락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가난이 비참한 건 가는 그 자체의 물질적인 궁색을 견디기 어려워서라기보다는 부의 지나친 편재로 배고파 죽겠는 처지에서 배불러 죽겠다는 이웃을 봐야 하는 괴로움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게다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과 금전의 다과를 인간을 재는 척도로 삼는 풍조 때문에 가난뱅이는 어디 가나 기죽을 못 펴고 위축돼서 사람이 지닐 최소한의 긍지도 못 지키고 비굴하게 한구석으로 비켜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현재 봉급 수준과 물가 수준으로 볼 때 우리의 생활이 궁색하다는 건 지극히 정당하고, 잘 산다면 그게 오히려 부당한 거다. 그런데 왜 정당하게 사는 사람이 위축되고 부당하게 사는 사람이 당당한가? 이거 엄청난 비리다. 어차피 비리가 판을 치는 세상인걸 무력한 백성이 새삼 뭘 어쩔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죽은 듯이 비리에 굴종만 할 것이 아니라 한번 과감히 도전해 봄직도 하지 않을까. 우리 스스로의 사람값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무능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가난이 아닌, 우리가 속한 사회가 가난한 것만큼의 정당한 가난은 고개를 들고 정면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여 한점 부끄러움도 없어야겠다. 의연하고 기품 있는 가난뱅이가 돼야겠다. 뿐만 아니라 부당하게 치부한 사람, 우리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 수준에서 동떨어지게, 엄청나게 잘 사는 사람을 준엄한 질책의 시선으로 지켜 보고, 경멸까지도 사양치 않음으로써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요즈음 많이 쓰이는 말로 상류층이란 말처럼 듣기에 민망한 말이 없다. 거액의 밀수 보석을 사들인 사람도 상류층, 위장 이민도 상류층--. 이 타락할 대고 타락한 정신이 어째서 우리의 상류층일 수 있단 말인가. 나라의 대들보건 기둥뿌리건 가리지 않고 갉아서 치부를 하고, 그 부를 보다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환물 투기를 일삼아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고, 일신의 안일에만 급급한 나머지 위기 의식만 예민해져, 보다 전쟁의 위험이 없는 나라로 도피할 궁리나 하는 게 이들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열심히 떳떳하게 사는 교포들의 정신 생활까지 해치는 게 이들이다.
쥐는 영감이 발달돼 난파할 배를 미리 알고 떠나 버린다는 말이 있다. 이들은 쥐새끼만한 영감도 없는 채 처신은 꼭 쥐처럼 약게 하다가 조국을 떠나는 것도 쥐새끼가 난파선 버리듯한다. 그러나 가난하나마 정신이 건강한 백성들은 조국을 난파선의 운명에 처한다 할지라도 결코 그 고난의 현장에서 피신하지 않고 끝내는 목숨을 걸고 난의 운명을 극복하고야 말 최후의 용기가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가난뱅이는 얼마든지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정신적인 상류층'을 자처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제 부흥에 안간힘을 쓰면서 우리는 '잘 살아 보자'를 외쳤었다. 이 '잘 살아 보자'가 차츰 '어떡하든 잘 살아 보자'가 되고 종당에는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잘 살아 보자'로 돼 버렸다. 물질적인 가치가 정신적인 가치 위에 군림하고 인간은 이제 완전히 물질의 노예로 타락하고 말았다. 지금이라도 이 인간의 타락을 구할 새로운 싹이 틀 고장이 있다면, 아직까지는 양심을 물욕에 팔지 않고 살아 온 떳떳한 가난뱅이들의 고장밖에 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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