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편"
이효석(1907__1942)
소설가. 호는 가산. 강원도 평창 출생. 경성 제대 법문학부 졸업. 숭실 전문 학교 교수 역임. 한국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주옥 같은 단편 소설을 썼던 이효석은 수필에도 여러 작품을 남겼다. 간결체 문장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시골
우거진 여름 나무 그림자가 아니라 잎이 떨어지고 가지만이 앙상하게 남은 겨울 나무의 그림자라는 것을 사람들은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을 듯하다. 우거진 나무 그림자라는 것은 으슥한 낮잠의 터는 되어도 겨울 나무 그림자의 외롭고 아름다움은 없다. 겨울 나무가 푸른 그림자를 처녀설의 흰 막 위에 던지고 있는 그림은 쓸쓸하면서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그림을 나는 겨울에 함경선을 지난 때에 가장 흔히 본다. 과수원이나 혹은 낙엽송림에 눈이 쌓여 아직 밟히지 않은 그 백지 위에 나뭇가지 혹은 수풀의 그림자가 푸른 목판화같이 또렷하게 밝혀져 있는 풍경은 아무리 상 주어도 오히려 부족하다. 차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지나가는 그 한 폭을 아깝게 여기며 다음 것을 기대하는 수밖에는 없다. 조촐하면서도 쓸쓸한 나무 그림자를 볼 때 나는 시골의 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차가 한적한 역에 머물러 눈에 싸인 마을을 바라보면서 고요한 길을 걷노라면 대체 마을에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없는가 그 속에도 생활이 있나... 의심하게 된다. 별것 아니라 나무 그림자 같은 생활이 그 속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이상한 것은 그런 생활에 곧 또 익어져 감이다. 화려한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쓸쓸한 곳에서도 사람은 살 수 있는 것이요, 살라는 마련인 듯하다.
무료한 속에서 나는 C의원을 찾는 날이 많았다. 응접실에서 난로를 쪼이면서 한가할 때의 닥터 B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지운다. 밤이면 나로가 달아서 한구석이 과실같이 새빨갛게 익은 것을 둘러싸고 앨범을 뒤적거리고 '우울한 일요일'의 레코드를 듣다가 이웃방에 준비되어 있는 늦은 만찬을 시작한다. 식탁의 진미는 인읍에서 주인이 손수 사 온 도미, 굴과 식혜, 수정과, 부인이 손수 만든 아이스크림, 더운 온돌방에서는 이 이상의 선미는 없다. 식사가 끝나면 윷놀이를 하고 상품을 나눈다. 그러나, 시골의 살림은 나무 그림자같이도 호적하고 쓸쓸하다. 난로를 끼고 창으로 눈을 내다보고--너무도 단조하면 젊은 B박사는 인읍으로 영화 구경을 종용한다. 30 몇 년 형인지의 조금 낡은 자가용 차를 손수 운전해 가지고 집 앞까지 맞으러 온다. 같이 타고 몇 마일권 채 못 가서 발동이 머물고 속력이 없어진다.
간신히 몰아 가지고 온 길을 되돌아 어디로 가는가 하고 의아해하노라면 차는 도로 병원으로 들어가 차고 앞에 선다. 여러 날 쓰지 않았던 차에 물을 넣은 지가 오래 된 까닭에 어느 결엔지 얼어 버려서 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굳은 눈이 구두 밑에서 빠작빠작 울리는 밤거리를 걸어가서 차부에서 버스를 타면 아무래도 인읍까지는 10분이 넘어 걸린다. 늦은 영화관에 들어가면 이어 케이블과 콜베엘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시작된다. 낡고 망측한 토키를 끝까지 듣고 나면 골이 띵하다.
거리의 찻집 '동'에서 이것도 망측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쯤 쉬다가 이번에는 택시를 세내서 고개를 넘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튿날 한낮은 되어서 B씨를 찾으면 그는 조반이 끝났다고 하면서 피곤의 빛을 띠고 나타난다. 들어 보면 놀라운 곡절이다. 새벽 네 시는 되어서 초에서 난산의 급한 환자가 있다고 사람이 뛰어온 까닭에 십리나 되는 원수대까지 차를 몰고 가, 사경의 산부를 수술하고 태아를 조각 조각 오려서 낸 후 집에 와서 잠깐 잠이 들었다가 늦은 조반을 먹고 나니 그 때라는 것이다. 아무렇거나 간에 단조를 깨뜨린 셈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병원의 흥분은 지나쳐 처참하다. 중요한 것은 산부의 뒷소식인데 며칠 후에 들으니 참혹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18세의 애잔한 소부가 마을의 젊은이와 눈이 맞아 만주에까지 뛰었다가 다시 마을에 돌아와 살림을 시작했으나, 마을 사람들의 눈에 나서 그가 위독할 때에 누구 한 사람 위문 오는 사람도 없고 수술을 시작할 때에는 물 끓여 부는 사람조차 아쉬워서 곤란이었다는 것이다.
말하는 B씨의 낯에도 피곤의 빛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쓸쓸하고 외로울 뿐만 아니라 비참한 이야기다. 시골의 생활이 겨울 나무 그림자같이 적적하고 외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나 나무 그림자의 푸르고 아름다운 점만은 이 산부의 이야기와 인연을 붙여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