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대표수필 - 김동리 외 9명
"김광섭편"
김광섭(1905~1977)
시인. 호는 이산. 함북 경성 출생.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 졸업. 대통령 공보 비서관, 세계 일보 사장, 경희대 교수 역임. 초기에는 고요한 서정과 냉철한 지성으로 민족 의식을 노래한 것이 많았으나 그 후로는 여유 있는 인생의 정취를 담았다. 말기의 시에는 사회 비평적 의식과 근원에서 향수가 짓들어 있다.
일관성에 대하여
내 나이 이제 일흔이니, 이른바 기성 세대다. 아니, 기성 세대에서 구세대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세대는 구세대임으로 겪어야 했던 과거가 있으니, 이는 젊은 세대들이 그들의 삶을 영위하는 데 혹 참고가 될지도 모른다. 70을 살고도 한 시간의 생각거리가 못 되는 인생이나마 여기 적는 것은 다만 '참고하기'를 바라는 뜻에서이다. 나는 1905년에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집안에는 자녀가 드물었기 때문에, 나의 조부모께서는 나를 백 날 동안 사람에게도 해에도 달에도 보이지 않으시고, 당신들의 방 안에서 무릎에다 놓고 키우셨다 한다. 나는 이 일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나쁜 일이나 하지 않으면서 살려고 생각한다. 이것이 평범한 한 아기를 그토록 소중히 여기신 그분들께 최소한으로나마 보답하는 길이라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까닭을 생각할 수도 있다. 내(우리 세대)가 다른 사람의 가해를 너무 많이 받았다는... 내가 어렸을 때 우리집 이웃에 서당이 있었다. 나는 거시 놀러 갔다가, 칼을 찬 누런 복색의 일본 헌병을 보았다. 그는 서당 아이들을 내쫓고 그 방을 썼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길에 버티고 서서 그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한 어린이의 감시자가 되었다. 나는 그를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이미지를 본 것이다. 내 사상의 씨도 그 때 뿌려진 것이다. 그 다음에 나는 독립군, 의병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간밤에 다녀갔다는 귓속 이야기가 들렸다. 소년은 무슨 장한 것을 남몰래 속에 품은 듯이 자랑스러웠다. 그 후, 삼일 운동을 보았다. 이것을 본 것이 나의 인생길의 방향을 고정시켰다. 소년은 이 때부터 이순신이니 김옥균이니 하는 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얼마 후, 나는 서울에 가서 중등 교육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것이 나의 책임을 다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망국민이기 때문에 당하는 괴로움, 그 수모는 형언할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당시 도쿄는 공산주의의 아성이었다. 나는 우리의 독립에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한동안 그들을 넘겨다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나는 차라리 조용한 한 인간으로 살자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힘이 없어 일제에 항거할 수도 없고, 이 땅의 아들이라 순종할 수도 없는 그 가운데, 미칠 듯이 달려드는 고민과 몸부림은 이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항일 운동에 가담하고 만 것이다. 참으로 뼈저린, 일본의 8년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나는 '극예술 연구회'에 들어갔다. 나는 물론 연극인이 아니다. 그러나 민족극을 수립해 보고 싶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참절비절한 현실이었으므로, 이 소극적인 저항마저 쉬운 일은 물론 아니었다.
나는 또 한편으로 교편을 잡았다. 영어 교과서는 나의 큰 위안이 되었다. 바이런, 셸리, 키츠, 워즈워즈 등의 시가 있었다. 나는 이 시들을 풀이하면서 민족을 이야기하고 자유를 말하고, 그리하여 간접적으로나마 학생들에게 '한국인임'을 깨우쳐 줄 수가 있었다. 끊임없이 일경에게 불려다니면서도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다. 궁성 요배라는 것도 할 수 없었고, 창씨 개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그들의 형무소에 갇힌 바 되었다. 그 때 나를 담당했던 일인 검사가, 너 같은 자를 내놓는다면 대일본 제국이 성립되지 못할 것이라고 극언하던 것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거기서 괴롭고 고독한 3년 8개월의 독방 신세를 졌다. 그 동안에 외국인이 될 수 없다는 나의 신념은 점점 굳어만 갔다. 감옥에서 나오자 나는 곧 광복을 맞이했다. 비록 병상의 몸으로나마, 제국주의의 시체를 보면서 목청껏 만세를 불렀다. 내가 부른 만세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려서 본 삼일 만세의 이미지 그대로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 이미지를 눈앞에 그리며, 사회 활동도 하고 반공 운동도 벌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공무원 노릇도 했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어린 나를 감시하던 그 일본 헌병, 소곤소곤 들리던 독립군 이야기, 어린 눈으로 바라본 삼일 운동, 이 일들은 모두 나의 어린 가슴 속에 민족사의 한 목표, 내가 향해서 걸어가야 할 목표를 설정해 준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아무것도 이룩한 것이 없지만, 그런대로 이 한 목표를 향하여 일관하게 가는 길이라 별다른 후회가 없다. 오늘날, 세계의 젊은이들 가운데는 방황하는 사람들이 적잖은 것 같다. 그들은 이 시대를 매우 어려운 때로 보고, 심각한 전환기니 상실의 시대니 하면서 고독해하고, 또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난무를 즐긴다고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풍조는 어느덧 우리나라에도 상륙하여, 일부 청소년들이 이에 쏠리고 있는 듯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것은 자기 방치다. 시대를 핑계삼지 말아야 한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들, 목적지가 있어도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 오직 그들만이 시대를 핑계삼아 불순하고 나약한 자기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족속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의 인도로 애급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복지를 향했다. 그러나, 그리로 가는 도중에 그들은 어찌했는가? 좀더 참지 못하고 추악한 난무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4백 년의 노예 생활에서 구제되는 날에도 자기를 찾지 못한 것이다. 이제 우리가 그들의 전철을 되밟아야 할 것인가? 우리는 명백한 목표가 있다. 안으로는 통일을 이룩하며, 밖으로는 세계에 웅비해야 할 우리들이다. 그것이 또한 제군의 자기 실현이기도 하다. 이렇듯 명명백백한 목표가 있는데도 방황해야 할 것인가? 작은 생활 하나하나에도 경건한 태도로 임하여 한 발씩 한 발씩 우리들의 목표에 접근해 가야 할 것이다.
인생, 나는 이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무엇인가 일관된 것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방황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것 같다. 더구나, 남에게 괴롭힘을 많이 받은 우리의 인생은 이것이 첫째 자기 구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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