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 언론인. 호는 소오. 함남 출생. 일본 니혼 대학 사학과 졸업. 동아 일보 편집 국장, 부사장, 새한 민보 사장 역임. '일장기 말소 사건' 당시의 동아 일보 편집 국장이었던 설의식은 민족주의자였으며 그의 날카로운 비평문 속에는 민족주의적인 사관과 지사풍의 자세가 담겨 있다. 그의 필치에는 독자들의 마음을 격동시키며 청신하게 각성시켜 주는 매력이 있다. 사물을 관조하되 근원으로부터 꿰뚫는 눈이 있었으며 거기에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여 그를 뛰어난 에세이스트로 빛나게 하였다. 수필집으로 "해방 이전", "화동 시대" 등이 있으며 '유관순 추념문'이 유명하다.
헐려 짓는 광화문
헐린다 헐린다 하던 광화문은 마침내 헐리기 시작한다. 총독부 청사 까닭으로 헐리고 정책 덕택으로 다시 짓게 된다. 원래 광화문은 물건이다. 울 줄도 알고, 웃을 줄도 알며, 노할 줄도 알고, 기뻐할 줄도 아는 사람이 아니다. 밟히면 꾸물거리고 죽이면 소리치는 생물이 아니라, 돌과 나무로 만들어진 거물이다.
의식 없는 물건이요, 말없는 건물이라 헐고 부수고 끌고 옮기고 하되, 반항도 회피도 기뻐도 설워도 아니 한다. 다만, 조선의 하늘과 조선의 땅을 같이한 조선의 백성들이 그를 위하여 아까워하고 못 잊어할 뿐이다. 오랜 동안 풍우를 같이 겪은 조선의 자손들이 그를 위하여 울어도 보고 설워도 할 뿐이다. 석공의 망치가 네 가슴을 두드릴 때 너는 앎이 없으리라마는 뚜닥닥 소리를 듣는 사람이 가슴아파하며 역군의 연장이 네 허리를 들출 때에 너는 괴로움이 없으리라마는 우지끈 하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허리 질려 할 것을 네가 과연 아느냐 모르느냐?
팔도 강산의 석재와 목재 인재의 정수를 뽑아 지은 광화문아! 돌덩이 한 개 옮기기에 억만 방울의 피가 흐르고 기왓장 한 개 덮기에 억만 줄기의 눈물이 흘렀던 광화문아! 청태 끼인 돌 틈에 이 흔적이 남아 있고 풍우 맞은 기둥에 그 자취가 어렸다 하면, 너는 옛 모양 그대로 있어야 네 생명이 있으며 너는 그 신세 그대로 무너져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풍우 몇백 년 동안에 충신도 드나들고 역적도 드나들며, 수구당도 드나들고 개화당도 드나들던 광화문아! 평화의 사자도 지나고 살벌의 총검도 지나며, 일로의 사절도 지나고 청국의 국빈도 지나던 광화문아! 그들을 맞고 그들을 보냄이 너의 타고난 천직이며 그 길을 인도하고 그 길을 가리킴이 너의 타고난 천명이었다 하면 너는 그 자리 그 곳을 떠나지 말아야 네 생명이 있으며 그 방향 그 터전을 옮기지 말아야 네 일생을 마칠 것이다.
너의 천명과 너의 천직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거니와 너의 생명과 너의 일생은 헐리는 그 순간에, 옮기는 그 찰나에 마지막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너의 마지막 운명을 우리는 알되 너는 모르니, 모르는 너는 모르고 지내려니와 아는 우리는 어떻게 지내랴?
총독부에서 헐기는 헐되 총독부에서 다시 지어 놓는다 한다. 그러나 다시 짓는 그 사람은 상투 짠 옛날 그 사람이 아니며 다시 짓는 그 솜씨는 웅건한 옛날의 그 솜씨가 아니다. 하물며 이때 이 사람의 감정과 기분과 이상이야 말하여 무엇하랴? 다시 옮기는 그 곳은 북악을 등진 옛날의 그 곳이 아니며 다시 옮기는 그 방향은 경복궁을 정면으로 한 옛날의 그 방향이 아니다. 서로 보지도 못한 지가 벌써 수년이나 된 경복궁 옛 대궐에는 장림에 남은 궂은비가 오락가락한다. 광화문 지붕에서 뚝딱 하는 망치 소리는 장안을 거쳐 북악에 부딪친다. 남산에도 부딪친다. 그리고 애달파하는 백의인의 가슴에 부딪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