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전
처음으로 '조선소설사'를 쓴 김태준은 이작품의 작자를 작품안에 나오는 몽유자인 유영으로 보았으나, '유영전'이란 표제가 있고, 작가가 작품끝에서 몽유자인 유영이 꿈을 깨고 나서 명산을 두루 찾아 놀다가 그맞힌 바를 알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몽유자인 유영을 작자로 볼수 없으므로, 이작품은 작자 미상으로 돌릴수밖에 없다. 그러나 선조조 임진왜란 이후의 황폐한 궁중의 묘사를 해 놓앗고, 몽유자인 유영이 선조 34년에 배경이 되어 있는 수성궁으로 들어갔다고 하는 선조 34년을 이 작품의 창작 연대로 보고자 한다.
운영전에 대하여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수성궁 몽유록'이다. '운영전'은 여주인공을 표제로 하였고, '유영전'은 몽유자를 표제로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원래 제목과 같이 꿈 속의 세계를 표현해 놓은 몽유소설의 유형에 속한다. 다른 몽유 소설에서는 작자 자신이 몽유자가 되고 주인공이 되어 있으나. 이 작품은 몽유자를 따로 설정해 놓았다. 이 작품의 몽유자인 유영이 선조 34년에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이 살았던 수성궁을 찾아가 술을 마시고 잠이 듦으로써 꿈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그 꿈 속에서 유영은 안평대군의 궁녀 운영과 노녀의 애인인 김 진사를 만나 그들의 비련을 듣는다는 것이 플롯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성법은 '달천몽유록'이나 '강도몽유록'과 같다.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중 구조에서는 플롯 중의 플롯이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의 중심은 몽유자가 듣는 남녀 주인공들의 비련담이다. 안평대군의 궁녀인 운영은 궁녀의 몸으로 궁 밖에 나가도 엄형에 처하고, 궁 밖 사람이 궁녀와 내통해도 궁 밖 사람을 엄벌에 처한다는 엄명을 거역하고 궁 밖에 살고 있는 김 진사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하여 김 진사는 밤중에 수성군의 높은 담을 넘어가 운영과 운우의 즐거움을 나누는데, 가을이 가고 겨울이 돌아와 눈이 와서 발자국이 나게 되니 궁인들이 수상히 여겼다. 이에 운영은 김 진사와 짜고 도망할 준비를 위해 가지고 있는 보물을 궁 밖으로 운반해 낸다.
안평대군은 드디어 운영과 김 진사의 관계를 알고 운영과 같이 있는 궁녀들을 문초하거니와, 작자는 궁녀들의 초사를 통하여 궁녀의 해방을 주장하였고, 궁녀들의 성 문제를 표현해 놓고 있다. 궁녀들의 초사를 받아 본 안평대군은 운영을 옥에 가두니, 운영은 옥중에서 목매어 자살하고 만다. 운영의 장사를 지내 준 김 진사도 운영의 뒤를 따라 자살하고 말았다는 것으로하여, 운영과김 진사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고 있다. 이와 같은 이 작품은 한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 할 수 있는, 우리 고전 소설에 잇어서 유일한 비극 소설이다. 작자는 이 작품에서 남녀간의 사랑이 인간의 가장 고귀한 생명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제시해 놓았다. 남녀가 일생을 살기 전에 이룩할 수 없는 사랑을 위하여 고귀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어리석은 행동이나, 사랑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이기에, 이 작품의 남녀 주인공들은 목숨을 스스로 끊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에는 왕궁에 한평생 갇혀 사는 궁녀의 해방을 제기해 놓았다. 작자는 밀폐되어 있는 궁중에서 자유로운 궁 밖의 생활이 그리워 몸부림치는 궁녀들의 정신 상태를 잘 묘사해 놓았다. 안평대군의 문초를 받고 올린 초사에서는 특히 궁녀들이 성적인 해방을 절규하고 있다. 이러한 처절한 절규는 그야말로 궁녀들의 인권 옹호라 하겠다. 이와 같은 웃사람에 대한 반항은 '윤지경전'이나 '춘향전'에서도 볼 수 있으나. 인간의 본성적인 성의 해방에대한 반항은 이 작품에서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이 작품은 우리 고전 소설에서 명작 중의 명작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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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전
수성궁은 안평대군의 옛날 집으로 장안성서쪽 인왕산 밑에 있었다. 산천이 수려하며, 용이 서리고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과 같이 험준했다. 사직이 남쪽에 있고 경복궁이 동쪽에 있었다. 인왕산의 산맥은 굽이쳐 내려오다가 수성궁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높은 봉우리를 이루었다. 비록 험준하지는 아니하나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거리에 흩어져 있는 점포와 온 장안의 저택이 바둑판과 같고 하늘의 별과 같아서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다. 모양은 완연히 베틀의 실오라기가 갈라진 것과 같이 정연했다. 동쪽을 바라보면 궁궐이 아득하며 복도가 공중에 비껴 있고 구름과 연기는 아침 저녁으로 푸름을 더하여 한층 운치를 보여 주고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한때주도들은 몸소 가아와 적동을 동반하고 가서놀았으며, 소인과 묵객들은 3월달 꽃피는 시절과 9월달 단풍이 익어 가는 시절에는 그 위에 올라서 놀지 아니하는 날이없었고, 음풍 영월 하면서 즐기느라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청파사인 유영은 이 동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익히 듣고있었다. 한 번 가서 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의상이남루하고 얼굴빛이 파리하여 유객의 조소를 살 것을 알고가려다가 주저한지가 오래 되었다. 만력 신축 춘삼월 가망에야 탁주 한 병을 샀으나, 동복도 없고 또 한 친구나 아는 사람도 없었다. 몸소 술병을 차고 홀로 궁문으로 들어가 보니, 구경 온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고 손가락질 하면서 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생은 하도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몰랐으나 바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높은 데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니, 새로 병화를 겪은 후라 장안의 궁궐과 성 안의 화려했던 집들은 당연하였다. 무너진 담도 깨어진 기와도 묻혀진 우물도 흙덩어리가 된 섬들도 찾아볼 수 없었다. 풀과 나무만 이 우거져 있었으며, 오직 동문 두어 간만이 우뚝이 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유생은 천석이 있는, 그윽하고도 깊숙한 서원으로 들어갔다. 온갖 풀이 우거져서 그림자가 밝은 못에 떨어져 있었고, 땅 위에 가득히 떨어져 있는 꽃잎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아니하여 미풍이 일 적마다 향기가 코를 찔렀다.
유생은 바위 위에 앉아 소동파가 지은 '아상조원춘반로 만지낙화무인소'라는 싯구를 읊었다. 문득 차고 있던 술병을 풀어서 다 마시고는 취하여 바윗가에 돌을 베개 삼아 누웠다. 잠시 후 술이 깨어 얼굴을 들어 살펴보니 유객은 다 흩어지고 없었다. 동산에는 달이 떠 있었고, 연기는 버들가지를 포근히 감쌌으며, 바람은 꽃잎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때 한 가닥 부드러운 말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 왔다.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서 찾아가 보았다. 한 소년이 절세미인과 마주앉아 있다가 유영이 옴을 보고 흔연히 일어나서 맞이하였다. 유영은 그 소년을 보고 물었다.
"수재는 어떠한 사람이관대, 낮을 택하지 않고 밤을 택해서 놀고 있느뇨."
소년은 빙긋이 웃으며, "옛 사람이 말한 '경개여고'란 말은 바로 우리를 두고 한 말이지요."하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이들 세 사람은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인이 나지막한 소리로 아이를 부르니, 시녀 두 사람이 숲속에서 나왔다. 미인은 그 아이들을 보고 이렀게 말했다.
"오늘 저녁에 우연히 고우를 만났고 또한 기약하지 않았던 반가운 손님을 만났으니, 오늘 밤을 쓸쓸하게 헛되이 넘길 수가 없구나. 그러니 네가 가서 주찬을 준비하고 아울러 붓과 벼루도 가지고 오너라."
두 시녀는 명령을 받고 갔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표연히 왕래하는데 마치 나는 새와 같았다. 유리로 만든 술병과 술잔, 그리고 자하주와 진기한 안주 등, 모두 인간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세 사람이 석 잔씩 마시고 나자, 미인이 또 새로운 노래를 불러술을 권했다. 노래를 마치고 나서 한숨을 쉬면서 흐느끼니 구슬 같은 눈물이 얼굴을 덮었다. 유영은 이상히 여겨 일어나 절하고 물었다.
"내 비록 양가의 집에 태어난 몸은 아니오나, 일찍부터 문묵에 종사하여 조금 문필의 고을 알고 있거니와 이제 그 가사를 들으니, 격조가 맑고 뛰어났으나 시상이 슬프니 매우 괴의하구려. 오늘 밤은 마침 월색이 낮과 같고 청풍이 솔솔 불어오니 이 좋은 밤을 즐길 만하거늘, 서로 마주 대하여 슬피 욺은 어인 일이오. 술잔을 더함에 따라 정의가 깊어졌어도 성명을 서로알지 못하고 회포도 펴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의심하지 않을 수 없구료."
유영은 먼저 자기의 성명을 말하고 강요했다. 이에 소년은 대답했다.
"성명을 말하지 아니함은 어떠한 뜻이 있어서 그러하온데, 당신이 구태여 알고자 할진대 가르쳐드리는 것은 무엇이 어려우리 까마는, 말을 하자면 장황합니다."
그리고는 수심 띤 얼굴을 하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나의 성은 김이라 합니다. 나이 10세에 시문을 잘하여학당에서 유명하였고 나이 13세에 진사 제이과에 오르니, 일시에 모든 사람들이 김 진사라고 부릅디다. 제가 나어린 호협한 기상으로 마음이 호탕함을 능히 억누르지 못하고 또한 이 여인으로하여 부모의 유체를 받들고서 마침내 불효의자식이 되고 말았으나. 천지 간에 한 죄인의 이름을 억지로 알아서 무엇하리까. 이 여인의 이름은 운영이요, 저 두 여인의이름은 하나는 녹주요, 하나는 송옥이라 하는데, 다옛날 안평대군의 궁인이었습니다."
"말을 하였다가 다하지 아니하면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것만같지 못합니다. 안평대군의 성시의 일이며, 진사가 상심하는 까닭을 자상이 들을 수 없겠소?" "성상이 여러 번 바뀌고 일월이 오래 되었는데, 그 때의 일을 그대는 능히 기억할 수 있겠소?"
운영은, "심중에 쌓여 잇는 원한을 어느 날인들 잊으리까. 제가이야기 해 볼 것이오니, 낭군님이 옆에 있다가 빠지는 것이 있거든 보충하여 주옵소서."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루는 동문 밖에 사는 한 무녀가 영이함으로써 명성을 얻고 대군의 궁에 드나들면서 매우 사랑과 신용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진사가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 무녀는 나이가 아직 30도 못 되는, 얼굴이 예쁜 여자로서 일찍 과부가 되고는 음녀로 자처하고 있었는데, 진사가 옴을 보고는 성대히 주찬을 갖추고서 대접하므로 진사는 잔을 잡았으나 마시지는 아니하고 말하기를, "오늘은 바쁘고 급한 일이 있으니 내일 다시오겠소."했습니다. 다음 날 또 가니 또한 그렇게 하므로, 진사는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또 말하기를, "내일 또 오겠소."했답니다. 무녀는 진사의 얼굴이 속된 티를 벗어난 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연일 진사가 왔다가 말 한 번 하지 않으므로, 나 어린 선비로 반드시 부끄러워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니 내가 먼저 정으로써 돋움어 붙들어 놓고 밤을 새우면서 같이 자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날, 목욕하여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꾸밈을 하고 꽃 같은 담요와 옥 같은 자리를 깔아놓고, 작은 계집종으로 하여금 문 밖에 앉아서 망을 보게 하였답니다. 진사가또 와서 그 얼굴과 꾸밈의 화려함에 베풀어 놓은 것의 아름다움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더니, 무녀가 "오늘 저녁은 어떠한 저녁이관대 이같이 훌륭한 분을 뵈옵게 되었을까"하였으나, 진사는 뜻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아니하고초연히 즐거워하지 않고 잇으니 무녀가 또 말하더랍니다.
"과부의 집에 젊은 남자가 어찌 왕래하기를 거리지 아니하는지요?" 진사가 "점이 신통하다던데 어찌 내가 찾아오는 뜻을 알지못하시오."하니, 무녀는 즉시 영전에 나아가 앉아서 신에게 절을 하고는, 방울을 흔들고 점대롱을 어루만지면서 온몸을 추운 듯이 떨며 한참 몸을 움직이다가 입을 열어 말하더랍니다. "당신은 정말로 가련합니다. 불안한 방법으로써 그 뜻을 이루기 어려운 계교를 성취시키고자 하니, 다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3년이 못 가서 황천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진사는 울면서 사례하고는, "당신이 비록 말하지 아니해도 나는 다 알고 있소. 하오나 마음 속에 맺힌 한은 백 가지 약으로도 풀 수 없으니, 만일 당신으로 말미암아 다행히 편지를 전하게 된다면 죽어도 또한 영광이겠소."하자, 무녀가, "비천한 무녀로서 비록 신사로 인해 때로 혹 드나들지만 부르시는 일이 없으면 감히 들어가질 못합니다. 그러하오나 진사님을 위하여한 번 가 보겠습니다."하더랍니다. 진사는 품속에 서한 봉서를 내어주면서 말씀했답니다. "조심하여, 잘못 전하고서 화의 기틀을 만드는 일이 없도록하여 주오." 무녀가 편지를 가지고 궁문을 들어가니, 궁 안 사람들이 모두 그 옴을 괴이히 여기기에 그 무녀는 권사로써 대답하고는틈을 엿보아 들을 사람이 없는 곳으로 저를 끌고 가서 편지를 주더이다. 저를 보기를 마치자, 소리가 끊기고 기가 막혀서 입으로는 능히말할 수 없었고, 눈물이 다하자 피가 눈물을 이었습니다. 병풍 뒤에 몸을 숨기고서 오직 사람이 알까 봐 두려워했어요. 이러한 후로부터 잠깐 사이도 잊을 수 없었으니, 시는 성정에서 나오는 거으로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이에 여러 사람은 다 이의가 없었습니다. 저는 물러나와 서궁으로 돌아가서 흰 나삼에다 가슴속에 가득 찬 슬픔과 원한을 써서 품에 넣고는, 자란과 같이 일부러 뒤떨어져 마부보고, "동문 밖에 있는 무녀가 가장 영험하다고 하니 내 그집에 가서 병을 묻고 오겠다."하고 이르니, 동복이 그 말대로 하였습니다. 저는 그 집에 가서 좋은 말로 애걸하며 말했어요. "오늘 찾아온 것은 김 진사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것뿐이오니, 가급적 통지해 주신다면 몸이 다하도록 은혜를 갚겠어요." 무녀가 그 말대로 사람을 보냈더니, 진사가 엎어지며 자빠지며 쫓아왔습니다. 둘이 서로 만나서 할 마로 하지 못하고 다만 눈물을 흘릴 뿐이었지요. 제가 편지를 주면서, "저녁을 타서 꼭 돌아 올 것이니 낭군님은 여기에서 기다려 주옵소서."하고는 바로 말을 타고 갔습니다. 진사는 편지를 뜯었습니다.
하루는 대군이 서궁 수헌에 앉아 계시다가 철쭉이 만발하였음을 보시고 시녀들에게 명하여 오언 절구를 지어올리라 하시었습니다. 대군이 보시고 칭찬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의들의 글이 날로 접점 발전하므로 내 매우 가상이 여기거니와, 다만 운영의 시에는 뚜렷이 사람을 생각하는 뜻이 있구나. 전일 부연시에 있어서도 다소 그러한 뜻이 있었으나 이 제 또한 이와 같으니, 네가 좇고자 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냐.김생의 상량문에도 의심할 만한 대목이 있었는데, 너는 김생을 생각하고 있지 아니하냐." 이에 저는 즉시 뜰에 내려 머리를 땅에 대고 울면서 고했어요. "대군께 한 번 의심을 보이고는 바로 곧 스스로 죽고자 했으나, 나이가 아직 30미만이고, 또 부모님을 뵙지 아니하고 죽으면구천지하에 죽어서도 유감이 있는 까닭으로 살기를 도적하여 여기까지 이르렀다가 또한 이제 의심을 나타냈사오니 한번 죽기를 어찌 애석히 여기리이까. 천지 귀신은 밝게 살피소서.시녀 다섯 사람이 잠시라도 떠나지 아니하였사온데 더러운 이름이 홀로 저에게만 돌아왔사오니, 살아도 죽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제가 이제 죽을 바를 얻었사옵니다." 바로 곧 비단 수건으로 스스로 난간에다 목을 맺더니, 자란이말했습니다. "대군께서는 이와 같이 영명한 죄 없는 시녀로 하여금 스스로 죽을 땅에 나아가게 하시니, 이로부터는 저희들은 맹세코 붓을 잡아 글을 짓지 아니하겠습니다." 대군이 비록 크게 노하셨으나 마음 속으로 정말로 죽이고 싶지는 아니한 고로, 자란으로 하여금 구하여서 죽지 못하게 하고는 대군이 흰 비단 다섯 필을 내어서 다섯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가장 잘 짓는 사람에겐 이로써 상을 주리라."하셨습니다. 이러한 후로부터 진사는 다시는 출입하지 아니하고 문을 닫고 병으로 누워 눈물은 베개와 이불을 적시었으니, 목숨은 가는 실오리와 같았어요. 특히 와서 보고는 말했습니다. "대장부 죽으면 죽었지, 어찌 상사 원결을 참고서초조하게 아녀자와 같이 상심하여 스스로 천금 같은 귀한 몸을 버리려고 하십니까. 이제는 마땅히 계교로써 취하기가 어렵지 아니하옵니다. 깊은 밤 고요할 때에 담을 넘고 들어가서 솜으로 입을 막고 업고 뛰쳐나오면, 누가 저를 감히 쫓으리이까." "그 계교도 또한 위험하니 정성을 다하여 물어보는 것만 같지못하다."
진사가 그 날 밤 들어오셨으나 저는 병이 들어 능히 일어나지 못하고 자란으로 하여금 맞해 들여 술 석잔을 권하게 하고는 봉서를 주면서,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니 삼생의 인연과 백 년의 가약이 오늘 밤으로 다한 것 같습니다. 혹 천연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마땅히 구천지하에서 서로 찾게 되겠지요."하고 말했습니다. 진사는 편지를 받고는 우두커니 서서 맥맥히 마주보다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더이다. 자란은 처량하여 차마 볼 수 없어 기둥에 기대어 몸을 숨기고 눈물을 뿌리면서 서 있었읍니다. 진사가 집에 돌아가서 봉서를 뜯어 보았습니다. 진사는 능히 다 보지를 못하고 기절하여 땅에 넘어지니 집사람들이 급히 구하여 다시 깨어났습니다. 특이 바깥에서 들어와, "궁인이 무슨 말로 대답하였기에 이렇듯 죽으려고 하십니까?"하고 물었으나, 진사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재보는 네가 잘 지키고 있느냐. 내 장차 팔아 가지고 부처님에게 바쳐서 숙약을 실천하리라." 특이 집으로 돌아와서 혼자 생각하기를, "궁녀가 나오지 아니하니 그 재보는 하늘과 나의 것이겠지."하며 벽을 향하여 남몰래 웃었으나, 사람들은 까닭을 알 수 없었어요. 하루는 특이 스스로 옷을 찢고 코를 쳐서 피가 흐르게하여 온몸을 더럽히고 머리를 흐뜨리고 맨발로 뛰어 들어와서는 뜰에 엎드려 울면서, "제가 강적의 습격을 받았습니다."하고는 다시는 말을 아니하고 기절한 사람과 같이 하니, 진사는 특이 죽으면 보화를 묻어 둔 곳을 알지 못할까 봐 근심이 되어 친히 약물을 달여여러 가지로 구하여 살려냈습니다. 술과 고리고 공궤하니 10여 일 만에 일어나서 말하기를, "외로운 한 몸이 홀로 산중에서 지키고 있는데 수많은 도적 떼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사세가 죽게 되었던 까닭으로 목숨을 걸고 도망해 와서 겨우 실오리 같은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거니와 만일 그 보화가 아니었다면 제게 어찌 이와 같은 위험이 있으리이까. 그러하오나 명령을 어김이 이와 같으니 어찌 빨리 죽지 아니하리이까."하고는 발로 땅을 구르고 주먹으로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므로, 진사는 부모님이 알까봐 두려워서 따뜻한 말로 위로하여 보냈다 합니다.
얼마 후, 진사는 특의 소행을 알고 노복 10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불의에 그 집을 둘러싸고 수색을 하였으나 다만 금팔지 한쌍과 운남 보경 하나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장물로 삼아 관가에 고소하여 찾아내고자 하나 일이 샐까 봐두렵고, 만일 그 보화를 얻지 못하면 부처님에게 바칠 수가 없고, 특을 죽이고자 하나 힘으로 능히 누를 수 없어서 입을 다물고 묵묵히 말을 하지 않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특이 스스로 그 죄를 알고는 궁장 밖에 있는 맹인한테 가서 물었습니다. "내 일전 새벽에 이 궁장 밖을 지나가다가 어떤 사람이 궁중에서 담을 넘어오기로 나는 도적인 줄로 알고 큰 소리를 치면서 뒤를 쫓앗습니다. 그놈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저는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감추어두고 임자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주인이 방구석에서 무엇을 찾다가 내가 물건을 주어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찾기로 내가 다른 재화는 없고 다만 팔찌와 거울 두 날을 얻었다고 한즉, 주인이 몸소 들어와서 찾다가과연 그 두 물건을 얻고도 또한 마음에 차지 않아 바야흐로 나를 죽이고자 합니다. 제가 달아나면 길하겠습니까?" 맹인이 "길하겠소."하니, 그 옆에 있던 사람들이 듣고는 특을보고, "너의 주인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노복을 학대하기가 그와 같은가?"하고 물었습니다. 특은, "우리 주인은 나이는 어리지만 조만간 당당히 급제할 것이오나, 탐욕하기가 그와 같으니, 다른날 조정에 설 때의 용심은 가히 알 수 잇지요."하고 대답했답니다. 이 말이 전파되어 궁중에 들어가고 궁인이 대군에게 고하니, 대군이 대로하시고는 남궁 사람으로 하여금 서궁을 찾아보게 한즉, 저의 의복과 보화가 모두 없어졌으므로 대군이 서궁 시녀 5인을뜰 가운데 불러놓고 형장을 눈앞에다 엄하게 갖추어 놓고는 영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이 5인을 죽여서 다른 사람을 경계하라."하시고는 또한 집장한 사람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장수를 헤아리지 말고 죽을 때까지 쳐라." 이에 5인이 호소하기를, "원하건대 한 번 말이나 하고 죽게 하여 주소서."하니 대군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고. 그 사정을다 말해 보아라."하셨습니다. 은섬이 먼저 글월을 올리니 이러했읍니다.
"남녀의 정욕은 음양의 이치에서 받은 것이므로,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심궁에 갇히자 외로운 몸이 되어 꽃을 봐도 눈물이 가리며, 달을 대하여도 넋을 잃어 매화나무에 앉은 꾀꼬리로 하여금 짝을 지어 날지 못하게 하며 발 사이에는 드나드는 제비로 하여금 양소를 얻지 못하게 하였사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스스로 정욕의 뜻을 이기지 못함이며, 또한 투기의 정을 이기지 못해서 그러할 뿐이오니어찌 슬프지 않으리까. 한 번 궁장을 넘어가면 인간의 낙을 알 수 있겠사오나 저희들은 오래도록 심궁에 갇히어 이와 같은 일을 하지 못하고 있사오니, 어찌 저희들의 힘으로 할 수 있으며 도 마음으로 참을 수 있으리이까. 오직 대군의 위엄이 두려워서 이 마음 을 굳게 지키고 있다가 시들어 죽어질 뿐이업니다. 궁중이 일에 있어서 이제 범한 죄가 없사옵는데도 불구하고 죽을 땅에 두고자 하오시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이까. 저희들은 구천지하에서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겠나이다." 다음으로 비취가 올리니 이러했습니다. "대군께서 사랑해 주신 은혜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사온, 어찌 감동하옴이 없사오리까. 저희들이 대군의 깊은 은혜에 감축하고는 홀로 심구에 거처하면서 달 밝은 가을 꽃 피는 봄날 에도 이 뜻을 변치 않고 오직 문묵과 현가에 종사하고 있을 따름이온데, 이제 씻을 수 없는 누명이 서궁에 미치고 말았사오니 어찌 원통하지 않으리이까. 살아도 죽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오직 엎드려 빌건대 빨리 죽을 땅으로 나아가게하여 주옵소서." 세 번째로 자란이 올리니 이러했습니다. "오늘 일은 죄가 헤어릴 수 없는데 있사오니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바를 어찌 차마 숨겨두리이까. 저희들은 여항의 천녀로서 아버지가 대순이 아니고 어머니가 이비가 아닌즉, 남녀간의 정욕이 어찌 홀로 저희들에게만 없겠습니까. 주나라 목왕도 천자로서 매양 요대의 낙을 생각하였고, 항우 같은 영웅도 해하의 눈물을 금치 못하였으며, 당현종 같은 영왕으로도 매야 마외의 한을 생각하였거니와, 대군께서는 어찌하여 운영으로하여금 홀로 운우의 정이 없다고 할 수 있사옵니까. 김생은 곧 당대의 단정한 선비이온데 내당으로 끌어들인 것도 대군께서 하신 일이오며, 운영에게 명하여 벼루를 받들게 한 것도대군의 영이었습니다. 운영이는 오래도록 심궁에 갇히어 있으면서 달 밝은 가을 꽃 피는 봄날이면 매양 마음을 상하였고, 오동잎에 떨어지는 밤비에는 몇 번이나 애를 끊었습니다. 한 번 호협한 남성을 보고 나서는 넋을 잃고 실성하여 병이 골수에 사무쳐서, 비록 죽지 않는 약과 월나라 사람의 손으로도 효력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사옵니다. 하루 저녁에 아침의 이슬과 같이 죽어지면 대군께서 비록 측은한 마음이 잇어 돌보고자 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한 번 주실 것 같으면 대군의 적선이 막대할 것이옵니다. 전일 운영의 훼절은 죄가 저에게 있사옵고 운영에게는 있지 아니하오니, 저의 이한 말씀은 위로는 대군을 속이지 아니하고 아래로는 동료를 저버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의 죽음은 죽어도 또한 영광이라 생각하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대군게서는 저의 몸으로써 운영의 목숨을 이어 주시옵소서." 네 번째로 옥녀가 아뢰니 이러하였습니다. "서궁의 영광을 저도 이미 같이하였사온데 서궁의 액운을 저만이 면할 수야 있겟습니까. 곤강도 같이 타고 옥석도 같이 타는 데 오늘의 죽음은 그 죽을 바를 얻었사오니 죽어도유감이 없겠습니다." 끝으로 제가 말했습니다. "대군의 은혜는 산과 같고 바다와 같사온데 능히 정절을 굳게지키지 못하였사오니 그 죄 하나이며, 전후로 지은 시에서 대군께의심을 보이고도 끝내 바로 아뢰지 못하였사오니 그 죄 둘이옵고, 서궁의 죄 없는 사람들이 저로 인하여 같이 죄를 받게 되었사오니 그 죄 셋이옵니다. 이와 같은 큰 죄를 셋이나 짓고서 산들 무슨 면목으로 살며, 만약 죽음을 면하여 주시다 하더라도 저는 마땅히 자결하여 처분을 기다리겠습니다."
대군은 보기를 마치시고 또 한 번 자란의 초사를 다시 펴고 보시는데 노염이 좀 풀리는 것 같으므로, 소옥이 꿇어앉아 울면서고하였습니다.
"전날 빨래하러 갈 때 성 안으로 가지 말자고 한 것은 저의 의견이었으나, 자란이 밤에 남궁으로 와서 매우 간절히 청하기에 제가 그 뜻을 안타까이 여겨 군의를 물리치고 따랐사옵니다. 운영의 훼절은 그 죄가 저의 몸에 있사옵고 운영에게 있지 아니하오니 저의 몸으로써 운영의 목숨을 이어 주옵소서."
이에 대군의 노여움이 좀 풀어져서 저를 별당에다 가두고 다른 궁녀들은 다 돌려보냈는데, 그 날 밤 저는 비단수건으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진사는 붓을 잡아 기록하고 운영은 옛일을 당겨서 이야기하는 데 매우 자상하였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다가 운영이 진사보고, "이로부터 이하는 낭군님께서 이야기하옵소서,"하고 말했다. 이에 진사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운영이 자결한 후, 모든 궁인들은 통곡하지 않는 사람이 없이 부모가 돌아가신 것같이 했습니다. 곡성이 궁문 밖에까지 들려 저도 또한 듣고서 오래도록 기절하여 있었습니다. 집사람들이 초혼하고 발상할 준비를 하는 한편 살려 내기에 힘쓰니, 해질 무렵에서야 겨우 깨어났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생각해 보니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저는 공불의 약속을 저버릴 수 엇어 구천의 영혼을 위로해 주고자 그 금팔찌와 보경과 문방기구를 다 팔아 가지고 쌀 40석을 사서 청녕사로 보내어 제를 올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믿을만한 사람이 없기로 사환을 시켜 특을 불러 오게 하고는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내 너의 전날의 죄를 전부 용서해 줄 것이니 이제 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느냐."
특은 엎드려 울면서, "제가 비록 어리석과 완악하나 또한 목석이 아니옵니다. 한 몸에 지은 죄가 머리카락을 다 뽑으면서 헤아려도 헤아리기 어려운 것을 이제 용서해 주시니, 이것은 고목에 잎이 나고 백골에 살이 붙는 것과 같사옵니다. 감히 진사님을 위하여 죽음을 다하지 아니하겠읍니까."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내 운영을 위하여 초례를 베풀어 놓고 불공을 드려 발원하고자 하나 신임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네가 가지 않겠느냐."하니, 특은 "삼가 분부를 받들겠습니다."하고는 즉시 절로 올라가서 3일을 궁둥이를 뚜드리면서 누워 놀다가 중을 불러 일렀습니다. "40석의 쌀을 어디에 쓰겠소. 다 부처님에게 바치겠는가. 오늘은 술과 고기를 많이 장만해 놓고 널리 속객을 불러 먹이는 것이 좋겠소." 그리고는 마을 여인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강제로 끌고 들어와승당에서 같이 자기를 수십 일을 지내고도 재를 올릴 생각을 하지 않더랍니다. 중들이 통분히 여기다가 그 초렛날에 미쳐서 특을 보고 말했답니다.
"불공하는 일은 시주가 중하온데, 시주가 이와 같이 불결하여 일이 극히 미안하오니, 저 맑은 시내에 가서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예를 행함이 좋겠소." 특은 마지못하여 나가 잠시 물로 씻고 들어와서는 부처님 앞에 꿇어앉아서 빌었지요. "진사는 오늘 빨리 죽고 운영은 내일 다시 살아나 특의 짝이되게하여 주소서." 이와 같이 3일을 밤낮으로 발원하는 말이 오직 이것뿐이었습니다. 특은 돌아와서 저에게 말하기를, "운영 아씨는 반드시 살길을 얻을 것입니다. 재를 올리던 그 날 밤에 저의 꿈에 나타나서 지성으로 발원해 주니 감사한 마음 다할 수 없다고 하면서 절하고 울었으며 중들의 꿈도 그러하였다 합니다."하므로, 저는 그 말을 믿었지요. 마침 계수나무가 누렇게 익는 계절이었습니다. 저는 비록 과거에 나아갈 뜻은 없었으나, 마음을 가다듬고 독서하고 있다가 청녕사에 올라가서 수일을 묵었습니다. 그 동안 특의 한 일을 중들로부터 자세히 듣고는 그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특이 없으니어찌 할 수 없었지요.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갔지요. 절하고 머리를 땅에 대고 향을 사르면서 합장하고 빌었답니다. "운영이 죽을 때의 약속이 하도 처량하여 차마 저버릴 수 없어 노복 특으로 하여금 지성으로 제를 올려 명복을 빌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축언을 들으매 그 패악함이 이루 말할 수 없고, 운영의 유언을 헛곳으로 돌아가게 하였사오니, 소자가 감히 무슨 면목으로 축언하리이까. 엎드려 바라건대 부처님께서는 운영으로 하여금 다시 살아나게 하시와 이 김생으로하여 짝을 짓게 하시고 운영과 이 김생으로 하여금 후세에 가서 이 원통함을 면하게하여 주옵소서. 부처님께서 정말로 이 소원을 들어 주신다면 운영은 비구니가 되어 십지를 불살라 가지고 십이층금탑을 지을 것이며, 이 김생은 비구승이 되어 오계를 닦아 세 거찰을 지어 부처님의 은혜를 갚겠사옵니다."
빌기를 마치고 일어나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수없이 절을 하고나왔습니다. 그랬더니 7일만에 특이 우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런 후부터 저는 세상 일에 뜻이 없어 목욕하여 몸을 정결히 하고 새옷으로 갈아 입고 고요한 곳에 누워 나흘을 먹지 않았지요. 마침내 한 번 깊이 탄식하고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몸이 되고 말았답니다. 쓰기를 마치자 붓을 던지고 두 사람은 마주보고 슬피 울면서 능히 스스로들 그칠 줄을 몰랐다. 유 영은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으니 소원이 없겠소. 원수인 종도 이미 없어졌고 통분함도 사라졌을 것인데, 어찌 슬퍼하여 마지 않는가,다시 인간에 나오기를 얻지 못하여 한함인가."
김생은 눈물을 흘리면서 사례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다같이 원한을 품고 죽었기로 염라대왕이 그죄 없음을 불쌍히 여겨 다시 인간에 태어나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지하의 낙이 인간보다 못하지 않는데, 하물며 천상의 낙은어떠하겠습니까? 이러므로써 인간에 나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만오늘 저녁 슬퍼한 것은 대군이 한 번 돌아가시자 고궁에주인이 없고, 까마귀와 새들이 슬피 울고 사람의 자취가 이르지아니하기로 그랬을 뿐입니다. 게다가 새로 병화를 겪은 후로 빛나던 집이 재가 되고 옥 같은 섬돌, 분같은 담이 모두 무너지고, 오직 섬도 위에 피어 있는 꽃만이 향기롭고 뜰에는 풀만이 깔리어 봄빛을 자랑할 뿐이니, 그 옛날의 모습이 바꾸어지지 아니하였다고는 하지만 인사의 변화가 쉬움이 이와 같거늘, 다시 와옛일을 생각하니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러면 그대들은 천상의 사람인가?"
"우리 두 사람은 본래 천상의 선인으로서 오래도록 옥황상제를 모시고 있었더니, 하루는 상제께서 태청궁에 앉아 저에게 옥동산의 과실을 따오라 하기로 제가 반도를 많이 따가지고 와서 운영이와 같이 먹다가 발각되어 진세에 적하되어 인간의 괴로움을 골고루 겪다가, 이제 옥황 상제께서 전의 허물을 용서하사 사멍궁으로 올라가서 다시 옥황상제의 향안 앞에서 상제를 모시게 하였삽기로 돌아가는 이때를 타서 바람의 수레를 타고 다시 진세의 옛날 놀던 곳을 찾아와 모았을 뿐입니다."
김생은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뿌리면서 운영의 손을 잡고 또 말했다.
"바다가 마르고 돌이 불에 타 버린들 우리들의 정은 사라지지않을 것이요. 또 땅이 늙고 하늘이 거칠어진들, 우리들의 원한은지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존군과 서로 만나 이와 같이 따뜻한 정을 나누었으니, 속세의 인연이 없으면 어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존군께서는 이 원고를 거두어 가지고 돌아가시와 영원히 전해 주시옵고, 경솔한 사람들의 입에 전하여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여 주시면 매우 다행으로생각하겠습니다. 이 때 유영도 또한 취하여 잠깐 누워 있다가 산새 소리에 깨어났다. 구름과 연기는 땅에 가득하고 새벽 빛은 창망한데, 사방을 살펴보아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다만 김생이 기록한 책자만이 있었다. 유 영은 쓸쓸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신책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왔다. 장 속에 감추어 두고 때때로 내어보고는 망연자실하여 침식을 전폐했다. 후에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더니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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