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의 필라델피아 의학회에서 조셉 리스터 경의 병원균설에 감명을 받은 미국의 의료 관계자는 조셉 로렌스 의사 한 사람이 아니었다. 브루클린에서 온 31세의 약제사 로버트 존슨도 저명한 영국인 외과 의사 리스터의 강의를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 리스터는 제재소에서 나오는 톱밥으로 만든 재료가 외과용으로 쓰이는 것을 탄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리스터는 수술할 때 사용하는 붕대는 모조리 석탄산 수용액에 담가 소독하고 있었다. 브루클린의 약제 회사 시밸리 앤 존슨의 공동 경영자였던 존슨은 미국의 병원에서 톱밥이나 그 밖에 여러 가지 불결한 기구가 사용되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토목 기사인 제임스와 변호사인 에드워드 형제에게, 리스터가 강의 때 이야기한 이론에 따라 개별 포장한 외과용 멸균 붕대를 만들어 판매하려는 자신의 계획에 참여해 달라고 설득했다. 1880년대 중반 이들 형제는 존슨 앤 존슨 회사를 설립하여 면과 거즈로 만든 타원형 붕대를 제조했다. 붕대 하나마다 세균을 막는 패키지에 밀폐하여 멀리 떨어진 병원이나 전쟁터의 의사에게도 위생적으로 운반되도록 한 것이다. 존슨 형제는 보건 위생업계에서 점점 성공을 거두었다. 1893년 존슨 형제는 미국의 어머니들을 겨누어 산뜻한 향내가 나는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를 팔기 위해, 조산부들이 사용할 출산용품이 한 벌 든 포장에 베이비 파우더를 서비스 상품으로 넣었다. 더불어 세계의 모든 가정 약장에 등장하게 될 멸균 제품이 곧이어 탄생하려 하고 있었다.
1920년에 존슨즈 앤 존슨의 사장인 제임스 존슨은 알 딕슨이라는 사원이 조그만 붕대를 손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구매과에서 면의 매입을 담당하고 있던 딕슨은 그 무렵 막 신혼생활을 시작한 사람이었다. 딕슨의 신부는 성격이 덜렁거려 늘상 부엌에서 칼에 베이고 불에 데이곤 했다. 그러나 남편 회사의 커다란 외과용 붕대를 사용하기에는 상처가 너무 작았으며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알 딕슨은 밴드에이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쉽게 붙일 수 있고 탄탄해서 무균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붕대를 연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딕슨은 아내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자기 회사의 멸균된 면과 거즈를 작게 잘라 반창고 중앙에 얹어 사용했다. 필요할 때마다 하나하나 만드는 것이 귀찮아진 딕슨은 이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두고 반창고의 달라붙는 부분에 일단 크리놀린의 뻣뻣한 천을 붙여 두는 것을 생각해 냈다. 제임스 존슨은 알 딕슨 사원이 두 장의 크리놀린 천을 벗겨 손쉽게 자신의 손가락에 붕대를 감는 것을 보았을 때 회사에 새로운 구급용품이 생긴 것을 알았다. 밴드에이드라는 이름은 이윽고 구급 반창고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는데, 존슨 앤 존슨 회사의 뉴브런즈윅 공장의 관리자인 W. 존슨 케논이 이 이름의 발안자였다. 그리고 최초의 접착 붕대 구급 반창고는 무균 상태에서 컨베이어 시스템으로, 그러나 손으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매상이 대단하지는 않았다. 구급 반창고 밴드에이드의 가장 강력한 선전맨 중에 그 회사의 연구부장 프레드릭 킬머(시인 조이스 킬머의 부친)박사가 있었다. 킬머는 1890년대 존슨즈 베이비 파우더의 개발과 마케팅의 책임자였으며 1920년대에는 밴드에이드의 판매 촉진 캠페인에 참가했다.
그는 밴드에이드가 베인 상처나 화상의 감염증을 예방하고 치료를 빠르게 한다는 사실을 의학적이고도 일반적인 기사로 써서 널리 알렸다. 회사가 한 가장 교묘한 선전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무료 밴드에이드를 전국의 보이스카웃단을 비롯해 지방의 푸줏간까지 무제한으로 배달한 것이었다. 밴드에이드의 인기가 치솟았다. 1924년에는 기계 생산으로 길이 약 7.5센티미터, 폭 약 2센티미터의 밴드에이드가 제조되고 있었다. 4년 뒤에는 통풍을 좋게 하여 치료를 더욱 빠르게 하기 위해 거즈 패드에 통기 구멍을 낸 밴드에이드가 미국에서 발매되었다. 밴드에이드의 발명자인 알 딕슨은 그 뒤에도 존슨 앤 존슨에 오랫동안 근무하여 부사장이 되어 중역으로 업무를 수행했다. 오늘날까지 가정집 약장에 반드시 한 개쯤은 들어 있는 소형 반창고는 이렇듯 한 애처가의 고안품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다. 회사에서 딕슨의 발명품에 대해 1921년에 제품이 판매되기 시작한 후 세상 사람들이 1천억 개 이상의 밴드에이드를 사용했다고 어림잡고 있다. 이 밴드에이드와 함께 상처를 치료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의약품이 소독제이다. 베인 상처를 깨끗이 하는데 사용하는 약 알코올성의 수렴제 위치해젤(wych hazel)은 위치해젤 나무, 즉 미국의 조록나무 잎과 나무껍질로 만든다. 열을 가하면 깍지가 터지는 이 키 작은 나무는 앵글로색슨 시대에 실용적인 면과 미신적인 면에서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뭇잎이 떨어지고 가지가 드러나 마치 나무가 죽은 듯이 보이는 만추가 되고 나서야 노란 꽃이 피므로 영국 주민들은 위치해젤 나무에 초자연적인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고승이 작은 위치해젤 가지를 들고 있으면 그 손은 군중 속에서 범죄인을 지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낭창낭창하고 작은 위치해젤 가지가 더욱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우물을 파기 위해 지하수 장소를 찾는 점술봉으로 삼은 것이었다. 실제 나무 이름에 있는 '위치'라는 단어는 가지가 낭창낭창한 나무를 뜻하는 앵글로색슨어 'wice'에서 왔다. 앵글로색슨족이 위치해젤 나무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일로 미루어 최초로 이 나무에서 약을 만든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좀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인디언 부족이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 1620년 메이플라워 호로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의 일단. 총 102명)에게 위치해젤 나무껍질로 통증이나 타박상, 찰과상을 완화시켜주는 로션제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다. 그 뒤 2세기 동안 사람들은 가정에서 자신들이 쓸 위치해젤을 만들고 있었다. 이 로션제는 미국에서 아주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다. 소독제, 세안제, 수렴제, 국소용 진통제, 냄새 제거, 화장수의 원료, 그리고 위치해젤의 알코올 성분이 재빨리 증발하여 땀을 흘리고 식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내므로 더운 날의 청량액(오늘날의 스플래시와 같은 것)으로도 사용했다.
1866년에는 뉴잉글랜드의 교사 토마스 뉴튼 디킨슨은 이것을 시판하면 돈벌이가 될 만큼 수요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을 했다. 그는 질이 좋은 미국산 위치해젤 나무가 자라는 들판이 가깝게 있는 코네티컷 주 어섹스의 코네티컷 강 연변에 제조소를 차렸다. 1860년대에 디킨슨의 위치해젤은 작은 나무통에 담겨 약국에 보내졌으며 약국은 그것을 병에 넣어 손님에게 팔았다. 딕슨의 위치해젤 처방이 무척 호평을 받았으므로 오늘날까지 기본적인 제조법은 바뀌지 않았다. 이것은 사람들이 적어도 300년 동안 약장에 넣어온 약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