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아벨리 평전 - 로베르토 리돌피
제6장 발렌티노에 대한 사절 시기 (2/2)
편지에는 쓰지 않았지만, 마키아벨리가 돌아오려는 또 다른 이유들 중 하나는 가엾은 아내 마리에타의 불평 때문이었다. 그는 아내의 불평을 막기 위해서 이번 출장이 8일 정도면 끝날 것이라고 말해 놓았으나, 이제 벌써 8주가 지나고 보니 그녀의 심정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혼자 지내기가 싫었던 그녀는 생질인 피에로 델 네로의 집으로 가버렸다. 그곳에서 남편도 돈도 없는 자시의 처지를 되돌아보게 된 (그녀는 스스로의 인생도 재산도 모두 내동대이쳐 버렸다는 자괴감에서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잘아려 있지 않지만 그를 매우 근심케 한 듯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그가 관직을 재임용받을 시한이 다가오고 있었는데, 당사자가 본국에 없다는 사실이 언제나 불리하게 작용함을 알고 있었던 마키아벨리는 출장중에 자신의 관직을 잃게 될까 우려하고 있었다. 물론 그의 친구들은 곤판로니에레가 그를 특히 좋아하고 또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거듭 이야기했으며, 곤팔로니에레가 그에게 보낸 편지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재임용 문제에 대해 알라만노 살비아티는 다음과 같이 썼다. ( 그 동안 공적으로 보아 재임용에 관해 부탁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정부 쪽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 특히 피렌체인들의 마음 씀씀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스스로 나서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놓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보오나코르시에게서 온 소식 역시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로는 새 정부가 먼저 서기들의 봉급을 깎고 나서, 이어 그들 자체를 줄이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관계하는 두 서기국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가 없는 동안, 제2서기국은 제1서기장인 마르첼로 비르질리오의 관장 아래 있었으나, 서기보들의 말로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는 또 대학 쪽에도 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마키아벨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보듯이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지금 난 내 일과 당신 일에다 강의까지 겹쳐서 죽을 지경이네.) 그를 대신해서 10인위원회 일을 하고 있었던 그의 친구 비아조는 편지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자네가 맡던 일을 보고 있는데,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네.) 그는 마키아벨리에게 일에 대해 또는 동료들에 대해 새로운 소식들을 전해 주곤 했는데, 그들은 언제나 서로 다투거나 운수 사나운 일을 당하곤 했다. 예컨데 안드레아 디 로몰로가 주사위 노름에 푹 빠져 있다는 소식이 들리는가 하면, 안토니오 델라 발레와 안드레아가 노름 때문에 사무실에서 다투다가 안드레아가 안토니오를 발로 차 그의 등허리를 다치게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곤 했던 것이다. 물론 사무실에서의 이러한 장난들이 음담패설로 윤색되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보다 좀더 그럴 듯하고 기발한 이야기를 그에게 전해 준 사람은 다른 서기보인 아고스티노 베스푸치였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스로가 겪은 재수 없는 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루는 어수룩한 정무위원 한 사람이 갑자기 방에 들어와서는 (어이, 어이, 이것 좀 받아써보게) 하고 소리쳤는데, 다른 동료들은 모두 슬금슬금 도망쳐 버리고 자기만 잡혀서 그 지겨운 글을 받아써야만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편지들은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우울한 보르자의 궁에서 빠져나와 잠시나마 톡톡 튀는 피렌체의 분위기를 느끼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그 역시(모두들 포복절도하게 만든) 자신의 이야기로 답을 대신하였다. 하지만 이 편지들은 유감스럽게도 모두 남아 잇지 않다. 그가 친구들에게 쓴 다른 편지들로 미루어볼 때, 이는 이탈리아 문학에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귀환을 원했던 모든 이유들에 앞서 무엇보다 결정적인 사실은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나로서는 그가 그렇게 탄원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자신의 귀환 문제를 좀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실제보다 더 아픈 척했는지 어떤지는 자세히 알 지 못한다. 하지만 11월 22일자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이틀 전 열이 심했으며, 지금도 틍증은 여전합니다.) 12월 6일에는 또 이렇게 썼다. (열이틀째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습니다. 이렇게 가다가는 들것에 실려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피렌체 정부는 그를 귀환시키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들것에 실려서라도 발렌티노의 뒤를 쫓아다녀야 할 형편이었다. 발렌티노 공작은 전군을 휘몰아 이곳저곳 집적거릴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 누군가가 분명히 손해를 입게 되겠지만 불똥이 어디로 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피렌체인들은 공작의 이러한 움직임과 가능하다면 그의 속마음까지도 가까이서 지켜볼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그 일을 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정부의 무리한 요구에 참다 못한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정무위원회에는 죄송한 말이지만, 명심해야 할 점은 누구도 그러한 일들을 알아맞추기란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이곳의 군주는 만사를 그 자신이 혼자 결정하나는 것입니다. 공상이나 꿈같은 일은 쓰려고 하지 않는 다음에야 이러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관련 사람들을 모아야만 하고 여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저는 지금 최선을 다해 시간을 쪼개어 낭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피렌체에서는 마키아벨리가 보낸 편지들을 읽고 상황을 분석했지만, 발렌티노의 첫 일격이 어디에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어떤 판단을 내리지 목하고 있었다. 단지 하나만은 확실했다. 그가 사태를 관망하면서 군세를 모으고 있으며, 그리하여 적이 그를 치기 전에 그가 적을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점은 이미 보르가 패배하여 군세를 상실했던 그 당시부터 내내 마카아벨리가 의심 많은 정무위원회에 보고해 온 사실이었다. 11월 19일, 여느 때처럼 발렌티노와 사담을 나누게 된 그는, 자신이 항상 그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측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사절로 온 첫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겨놓았더라면 (발렌티노에게는 그것이 마치 예언처럼 보였으리라는 것)을 아첨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자신감 속에서 감히 이야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도 말했으나, 대체로 (발렌티노는 혼자이고 적은 다수이므로 그러한 추론의 연결고리는 쉽사리 끊어질 수도 있음)을 주지시켰다.
사실 평화는 바야프로 가까이 와 있었다. 발렌티노느 마음이 바뀐 프랑스 왕이 다시 휘하에 받아들인 벤티볼리오뿐만 아니라 그가 주도면밀한 계산 아래 (반군 무리에서 꾀어낸) 그 진중치 못한 오르시니 가의 인물들과도 화평을 맺었으며, 이에 다른 반군 우두머리들도 그 뒤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조네에서 공모자들을 묶어놓았던 결속의 끝이 끊어지게 된 데는 왕과 교황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발렌티노의 끈질긴 위장도 한몫을 하였다. 그에게는 어제의 적들과 그럴 듯하게 쌓아놓은 유대를 파기해 버리는 것 역시 쉬운 일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세상사가 흘러가는 방식이라는 점은 마키아벨리가 (특히 오늘날 신의라는 것이 얼마나 유명무실한가를 생각하게 하면서) (이처럼 평화가 도래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전쟁을 분비하는 발렌티노의 태도에 대해) 10인위원회에 써보낸 편지에 예견되고 있었다. 얼마 후, 그는 비텔로초가 발렌티노에게 (복종과 감사의 정이 넘치는 )편지를 보냈음을 10인위원회에 전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발렌티노는 모든 것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을 읽거나 알아채기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가 무슨일을 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 문제에 관해 무언가 견해를 말하라면...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의 예언은 곧 맞아떨어지게 된다.
12월 9일 발렌티노는 군대를 체세나로 이동시켰고, 마키아벨리는 이틀 뒤 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가 않았는데, 그것은 몸도 돈도 좋은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그는 10인위원회에다 자신이 설사(상황이 돌아가는 대로 따른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식으로 위협조의 편지까지 쓴 바 있었다. 이에 대해 소데리니는 (지금 무엇보다 긴급한 일은 당신의 경비를 조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답장과 함께 그에게 25두카토의 돈을 보내왔다. 이렇게 마키아벨리의 어려운 형편을 크게 도닥거려주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당신은 그곳에서 무슨일이 진행되는 지를 계속 주시하면서 수시로 상황을 보고해 주기 바라오. 그리고 그쪽 형편이 불리는 대로 당신의 복귀를 주선할 것이며, 그때까지도 발렌티노공과 계속 접촉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우리는 당신의 후임자를 임명할 것이오 그러니까 당신도 당분간은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일을 충실히 봐지기 바라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직분을 성실히 해나갔음은 물론이다. 곤팔로니에레의 처방이 그에게 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체세나에서의 상황 판단은 이몰라에서보다 결코 더 쉬워 보이지 않았다. 누구는 발렌티노가 나폴리 왕국으로 진격해 들어갈 것이라고도 하고, 또 누구는 베네치아에 대적하기 위해 라벤나와 체르비아로 갈 것이라고도 하였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그가 먼저(자신을 모욕되게 했고 나라까지도 거의 잃게 하기 직전까지 몰고 갔던 그 위인들을 확실히 처리하려) 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사이, 단지 방관자에 불과하지 또는 그이 행동을 부추기는 배후의 힘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교황은 로마에서 사태가 이렇게 지연된 데 대해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의 말로는 그가 큰 소리로 (이 창녀의 자식 같은 놈, 이 사생아 같은 놈!) 하면서 그를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포도주 맛을 속이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이란 화를 내는 중에 자기도 모르게 속의 진실을 드러내 보이는 법인 것이다.
12월 26일, 발렌티노는 4일 전 갑자기 그곳을 떠난 프랑스 창기병을 제외한 모든 군세를 이동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의 행동을 미리 짐작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구한 억측과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는 떠나면서, 한때 로마냐 사람들을 다스리는 데에 자신의 충실한 도구였던 그 권세 있고 잔혹했던 라미로 로르콰의 둘로 절단된 시체를 시 광장에 두고 갔다.((군주론) 7장에 나오는 동일 인물 라미오 데 오르코의 예를 참조할 것 - 옮긴이). 이 피비린내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는 자신의 부하에 대한 사람들의 증오를 털어내고, 스스로가 (부하의 자리를 그 공과에 따라 좌지우지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의로운 군주라는 이름 아래 자신을 숨기려 하였던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유명한 사건 역시 그로부터 어떤 교훈과 행위 규범을 끌어낼 수 있을 만한 것으로 주목하였다.
바로 그 12월 26일, 그리고 그 해의 남은 마지막 5일 동안, 사태는 마치 체스판에서처럼 연이어 숨가쁘게 돌아갔다.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는 발렌티노의 이름 아래 그 명령을 받들어 세니갈리아르 점령하였다. 그는 그의 군세를 숨기기 위해서 병사들을 소규모 분대로 편성하여 파노로 이동시켰는데, 정작 그 자신은 그곳에서 매우 신속하게 세니갈리아로 달려갔다. 도중에 비텔로초, 파올로 오르시니, 그라비나 공작 등과 우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만난 그는, 그들과 화기애애하게 담소하면서 자신이 군대 일부를 거느리고 그 동시에 입성하엿따. 도착 후, 그는 올리베로토 다 페르모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신호를 보내면 즉시 장군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뒤, 보르자니 가와 비텔리의 군대를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이미 파노에서 발렌티노로부터 이 일에 대해 슬쩍 암시를 받앗던 마키아벨리는 그의 뒤를 따라가 이 혼란의 장면을 목격하였다. 사태가 절정에 달했을 무렵, 그는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10인위원회에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썼다. (이곳에서는 여전히 약탈이 진행중이고, 지금 시각은 23시입니다. 저는 매우 걱정이 됩니다. 이 편지를 전해 줄 사람을 찾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 올리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그들이 내일까지 살아 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실 비텔로초와 올리베로토에겍 그 해의 말일은 곧 자신들의 생에서 마지막 날이 되고 말았다. 다른 둘의 처형은 교황이 오르시니 추기경과 그 가문의 나머지 인물들을 잡아들일 수 있을 때까지 연기되었다. 그의 행위는 물론 죄악이었지만, 그것은 완벽한 일격이었다. 피렌체의 서기장에게는 발렌티노라는 인물이 커다란 모습으로 다가왔다.
새벽 2시경, 보르자는 그를 불러 (더없이 환한 얼굴로) 자신의 성공을 자축하였다. 그리고는 피렌체인들로서는 (매우 똑똑하고 솔깃하게 들리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인즉, 피렌체인들은 자신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그들을 없앨 수 있다면 아마 2O만 두카토라도 쉽게내놓았을 것이고, 또 (설사 그랬다 해도) 결코로 자신이 한 것만큼(그렇게 깨끗이 그들을 제거할 수는 없었을)바로 그 시점에 그들을 없애준데 대해 감사해야 하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치타 디 카스텔로와 페루자 공략에 일조할 군대를 보내줄 것을 피렌체에 요구하였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에 편지를 썼다. 그러나 발렌티노의 움직임은 이 편지들을 가재고 간 전령들보다 더 빨랐다. 1503년 1월 1일, 그는 이미 전군을 몰아 코리날도에 가 있었으며, 3일에는 사쏘페라토에, 그리고 5일에는 괄도에까지 진격하였다. 그는 그날 그곳에 잠시 머물면서 치타 디 카스텔로의 사절들로부터 항복의 뜻을 전해 받았고, 이튿날에는 페루자의 사절들이 역시 같은 의사를 표명해 왔다. 그들의 말로는 도시민들이 (두카 두카) (두카란 공작이라는 뜻 - 옮긴이)하고 발렌티노의 이름을 외치면서 일어났으며, 잠파올로 발리오니는 오르시니 가와 비텔리의 얼마 남지 않은 잔당을 이끌고 황급히 시에나로 도망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에나 판돌포 페트루치 역시 발렌티노의 발톱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보다 더 안심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판돌포는 1487년 36세의 나이로 시에나의 정권을 장악한 뒤, 자신의 장인을 암살하고 마조네 가를 부추겨 보르자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도록 만든 인물임 - 옮긴이)
페루자도 시에나도 들었네
히드라의 숨소리를.
두 참주는 도망쳤네
그의 분노를 피해.
이 사건이 일어난 지 오랜 후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썼다. 당시 이히드라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진격을 계속해 나갔다. 8일 그는 아씨시에 있었고, 10일에는 토르차노로 진출하였다. 그곳에서 발렌티노는 마키아벨리를 불러 시에나 사건에 관해 장황하게 얘기하였다. 그는 자신이 그 도시에 아무런 의도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다만 페트루치를 내쫓고 싶을 뿐이라고 말하면서, 피렌체가 이 일을 도와줄 수 있으리라는 의중을 내보였다. 그의 군대는 이제 시에나의 속령인 큐시를 향하고 있었다. 발렌티노와 또 한번 긴 말의 공방전을 나눈 치타 델라피에베에서 마키아벨리는 10인위원회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속에는 자신이 되풀이해서 올렸던 진언을 받아들여 그들이 마침내 발렌티노에 보내는 대사로 명망 인사인 야코포 살비아티를 임명했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20일, 판돌포 역시 히드라로부터 도망치고 잇을 때, 마키아벨리는 보르자 진영을 떠나 피렌체를 향해 출발하였다. 그는 23일 집으로 돌아왔다.
마키아벨리의 사절 임무는 보르자의 그 은밀한 심중에서 복수의 계획이 처음 싹 튼 때에 시작하여 1502년말 피로 물든 복수극이 일어나던 그 비극적인 날 밤에 끝난 셈이었다. 그가 이러한 사적의 기간을 통해 얻은 유일한 결실이 유명한 (발렌티노가 비텔로초 비텔리 등을 죽이는데 사용한 방법에 관한 묘사 Descrizione del modo tenuto dal Duca Valentino nell'sammazzare Vitellozzo Vitelli ecc)인데, 이는 복수극의 전말을 보고서 형식이 아닌 순수한 문학 작품의 형식으로 짤막하게 묘사해 놓은 것이다. 그르나 이 작품을 그 사건에 관한 공식 서한들과 비교해 본 학자들에 따르면, 실제와는 다르게 묘사하거나 또는 사시을 과장하면서 서건의 과정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마키아벨 리가 발렌티로르 이상화라려 했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다만 그 군주가 지닌 어떤 품성과 조건들을 각별히 칭송했을 뿐이며, 그리하여 마치 화가가 자신의 이상저인 그림을 위해 삶으로부터 어떤 측면들을 취하는 것과 같이, 그도 이러한 품성과 조건들을 어떤 추상적인 군주상에 대입시켜 당시의 다른 군주들 속에서 그러한 요소들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었다. 비록 그런 인물을 찾지는 못했지만,
피렌체의 서기장이 이 사절 임무중 보르자란 선생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해 왔고, 우리 역시 그것을 이 자에서 지적한 바 잇다. 이 말의 뜻은, 무언가 분명히 위대하고 기억될 만한 행적, 무언가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러한 행적 앞에서, 그는 그로부터 과학적 이론들을 끌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흔히 생각하듯이 마키아벨리가 바로 오직 그때 그곳에서 마키아벨리즘을 배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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