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왜? - 여성 억압의 어제와 오늘 : 서진영
제1부 : 하늘에서 땅으로
제2장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
1. 생산력의 발전과 잉여 생산물의 발생 여성의 지위 변화는 새로운 생산력과 분업의 발달에 따라 일어났다. 원시 시대 말기에 이르자 원시 농경과 수렵 대신 본격적인 농업과 목축이 주요한 산업이 되었다. 농업과 목축의 발전은 생산력을 엄청나게 발달시켰으며, 이러한 생산력의 발전은 낮은 생산력에 기초하여 느리게 발전하고 있던 원시 사회를 뒤흔들어 버렸다. 그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잉여 생산물 이 생겼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원시 시대에는 한 사람이 자신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것 이상을 생산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낮은 생산력과 적은 사회적 부가 당시의 평등한 생산 관계, 가족 관계의 토대였다. 그러나 이제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이는 공동으로 분배되지 않고 그것을 생산한 가족에게 돌아갔다.
구세계(유럽 : 역주)에서는 가축을 길들이고 사육함으로써 전대미문의 부의 원천이 생겨났고, 전혀 새로운 사회 관계가 발생하였다. 미개의 낮은 단계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고정적인 재산은 대개 집, 옷, 조잡한 장신구, 쪽배, 무기, 단순한 종류의 가재 도구 등 음식물을 획득하고 조리하는 도구들이었다. 식량은 그날그날 새로 획득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말, 낙타, 나귀, 소, 양, 염소, 돼지 등을 사육하게 된 유목 민족들(인도의 5개 강 유역, 갠지스강 유역과 당시에는 물이 풍부했던 옥수스강,약사르테르강 유역 초원의 아리아인들,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의 셈인)들은 그저 조금만 보살펴 주고 지켜 주기만 하면 계속 번식하면서 우유와 고기 등의 식량을 가장 풍부하게 공급해 주는 재산을 가지게 되었다. 종전의 식량 조달 수단은 이제 중요성을 잃었다. 이전에는 필수적이었던 사냥이 이제는 사치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새로운 부는 누구에게 돌아갔을까? 물론 처음에는 씨족의 재산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축의 사유화는 가축 사육이 시작된 초기부터 발생하였을 것이다. 잉여 생산물이 가족의 사유 재산이 되자, 이는 두 가지 면에서 불평등을 낳았다. 즉 가족 관계와 생산 관게 양면에서 불평등이 발생하였다.
1) 남성의 반역 우선 가족 내의 불평등, 즉 남편과 아내 사이의 불평등이 생겨났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으로 인해 잉여 생산물이 남성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가축들과 새로운 부가 생기면서 가족에 있어서 하나의 혁명이 일어났다. 생활 필수품을 획득하는 것은 항상적으로 남성의 일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남성이 이 획득 수단을 생산하고 소유했다. 가축은 생활 필수품을 생산하는 새로운 수단이었다. 남성들은 짐승들을 잡아 길들이고 돌보는 일을 했다. 그리하여 가축이 그의 소유가 되었고, 가축과 교환한 상품과 노예도 그의 소유가 되었다. 이제 생활 필수품의 생산에서 나오는 모든 잉여는 남성의 차지가 되었다. 여성도 그 생활 필수품을 함께 사용하였지만 아무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난폭한' 사냥꾼과 전사는 가정 안에서는 여성 다음 가는 지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보다 온순한' 목자는 자기의 부를 믿고 스스로 첫째 지위로 돌진하여 여성을 둘째 지위로 밀어내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불평할 수 없었다. 가족 내의 분업이 남녀간의 재산 분배를 규정하였다. 즉 여성의 가내 노동은 더 이상 남성의 생활 필수품 획득과 같은 위치에 설 수 없게 되었다. 후자가 전부이고 전자는 보잘 것 없는 덤이었다. 새로운 생산력(분업)의 발전과 함께 성별 분업이 재편되었다. 새로 중심적인 산업이 된 농업과 목축을 남성이 주로 맡고 여성은 육아 등 가내 서비스 노동과 요리, 옷감 짜기와 의복 짓기 등을 주로 맡았다. 이제 여성은 노동에서 부차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요리, 빨래, 청소 등의 가내 노동은 인간이 수렵이나 채집을 통해 얻은 자연 산물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다 적합하게 변화시키는 노동으로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고,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발전을 촉진하였다. 요리, 육아, 질병 치료 등의 노동이 분화 발전함으로써 인간의 생존율이 높아지고 인간이 자연과 사회에 보다 빨리, 잘 적응하게 되었으며, 인간이 생산 노동에서 이룩한 발전을 축적하도록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전에도 가내 노동이 조금씩 행해졌지만, 주요한 분업으로 되지는 못했다. 그러던 것이 농업의 발달에 의해 물자가 풍부해지고 모든 사람이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줄어듦에 따라 가내 노동이 본격적으로 분화되어 하나의 독립적인 노동 분야가 되었고, 여성들이 보다 많은 시간을 여기에 쏟게 되었다.
농업 노동과 가내 노동 사이의 성별 분업은 여성이 채집이나 원시 농경을 담당하던 분업과는 달리, 여성의 지위를 약화시켰다. 그것은 양자의 다음과 같은 차이 때문이다. 농업 노동이 당시 생산력의 발전에 직접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한 데 비해 가내 서비스 노동은 생산 노동의 발전에 의해 규정되며, 부차적인 위치를 갖는다. 가내 서비스 노동은 생산 노동의 성과를 이용하는 노동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생산 노동의 발전에 의해 규정된다. 예를 들어 요리 기술의 발달은 생산되는 음식물의 종류와 양, 동력의 발달 등 생산 도구의 발달에 달려 있다. 가내 서비스 노동의 발달 역시 생산력의 중요한 일부인 인간 자신의 발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생산 노동의 발달을 촉진하지만 양자의 관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농업 등 생산 노동의 발달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점은 생산 노동이 잉여 생산물을 낳는 데 비해 가내 서비스 노동은 잉여 생산물을 낳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내 서비스 노동은 가족의 소비를 위한 노동이므로 가족의 소비에 필요한 것 이상을 생산할 필요가 없다. 농경과 목축을 통해 소비하고도 남는 곡식과 가축이 점점 더 증가하는데 비해 가내 서비스 노동에서는 아무런 잉여 생산물도 생길 수 없다. 또 당시 여성들이 옷감 짜는 법을 개발하고 의복 만들기를 했지만, 이것 역시 당시에는 농산물에 비해 중요한 부의 원천이 되지 못했다. 성별 분업이 농업 노동과 가내 노동의 분업으로 변화함에 따라 생산 노동에서 발생한 잉여는 그것을 담당한 남성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이에 반해 가내 노동을 담당한 여성들은 소유로부터 배제되어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잉여 생산물과 사유 재산이 발생한 이 단계에 이르러 분업이 그 안에 잠재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분배의 불평등이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모든 모순을 그 안에 포함하고 가족 내의 자연 발생적 분업 및 사회가 각기 대립적 가족으로 분열되는 데 기초하고 있는 분업은, 분업임과 동시에 분배, 그것도 노동과 그 생산물의 양적 및 질적으로 '불평등한' 분배이며, 그에 따른 소유이기도 하다. 이 소유의 싹 혹은 최초의 형태는 처와 자식이 남편의 노예로 되어 있는 가족 내에 의존한다. 이런 가족 내의 잠재적 노예 상태는 아직 매우 조야하기는 하지만, 최초의 소유 형태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조차도 소유는 그것을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처분력이라고 부르는 근대 경제학자의 정의와 완전히 일치한다. 결국 분업과 사적 소유는 동일한 표현이다. 곧, 똑같은 것이 한편에서는 활동에 관해서, 다른 한편에서는 활동의 산물에 관해서 언표된 것이다.
원시 시대의 분업은 잠재적으로 불평등한 분배를 내포하는 것이지만, 아직 불평등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잉여 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고 그것을 누가 가질 것이냐가 문제가 되는 순간, 분업은 소유의 불평등을 낳는 기초로서 현실화되었다. 생산 노동에서 여성이 부차적인 위치에 놓이고, 이로 인해 재산의 소유에서 배제되자, 여성은 가족 내에서 남성에게 종속되었다. 남성은 사유 재산에 기초해 여성보다 우월한 위치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이를 자기 자식에게 상속시키기 위해 기존의 모계제 사회를 전복시키고 부계제를 확립했다. 모계 씨족에서 재산은 모계를 따라 상속되어 남자가 죽으면 그의 가축이 그의 형제 자매(그의 어머니의 자식들)와 그의 자매의 자녀, 또는 이모의 자녀들에게 상속되었다. 그들의 친자식은 아버지쪽 씨족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상속을 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가 증대함에 따라 남성들은 강화된 지위를 이용하여 전통적인 상속 제도를 폐지하였다. 이렇게 하여 새로이 확립된 남성 독재의 최초의 산물은 당시 발생하고 있던 가부장제 가족이라는 과도적인 형태다. 가부장제 가족의 주된 특징은 자유민과 비자유민이 가장의 권력 아래 가족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족 형태의 완성된 유형은 로마의 가족이다. 가족을 뜻하는 영어 패밀리(family)는 가내 노예를 뜻하는 파뮬러스(famulus), 한 사람에게 종속된 노예 전체를 뜻하는 파밀리아(familia)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로마인들은 한 명의 우두머리 남자가 아내와 자녀 그리고 다수의 노예들을 다스리고, 이들 전체에 대해 생사여탈권을 가졌던 새로운 사회 조직을 가리키기 위해 이 말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대체로 고대 부족 국가 성립기에 지배층을 중심으로 하여 부계 계승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사유 재산과 계급의 형성에 따른 모계의 전복과 가부장제의 성립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반역이 계급 발생 이후의 어떠한 반역보다도 쉬웠으며, 이 과정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여성들이 사유 재산의 소유자가 아니었고 지배 계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이미 그 수중에 지배를 위한 물적 기초인 사유 재산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이에 반해 여성들은 보잘 것 없는 가내 도구와 껍데기만 남은 옛날의 권위밖에 가진 게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노동에서의 남성의 우위가 가족 내에서의 우위를 가져옴으로써 엥겔스가 말한 여성의 세계사적 패배가 일어났다.
2) 계급의 발생
잉여 생산물의 사유화는 가족 내의 불평등뿐 아니라 가족들간의 불평등을 낳았다. 잉여 생산물이 개별 가족에게 사유화되자 한편으로는 개별 가족들 사이에 빈부의 차이가 생겨날 가능성이,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할 가능성이 생겨났다. 인간이 자기가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생활 자료 이상을 생산하지 못할 때에는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할 수가 없었다. 그때에는 전쟁에 의해 포로가 생겨도 그들을 살해하거나 아니면 동등한 종족의 성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상황은 변했다. 한편으로는 부채 노예가 생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복 전쟁의 포로가 노예로 이용되었다. 노예는 가축과 함께 부의 원천이었으며, 노예 역시 개별 가족의 소유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평등한 생산 관계는 무너지고, 한편에는 토지를 비롯한 부를 소유하고 노예를 부리는 지배자들과 다른 한편에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소유자들을 위해 일해야 하는 노예들로 계급적 분화가 이루어졌다.
2. 가족의 변화
1) 경제적인 것이 지배하는 시대 생산 관계가 평등한 관계로부터 계급 관계로 변함에 따라 가족은 이제 단순히 종족의 번식을 위한 관계가 아니라, 재산 상속을 통해 계급을 유지하는 기능을 하게 되었다. 사유 재산은 가족을 통한 상속을 전제하지 않고는 애당초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제 가족이나 친족은 더 이상 유일한 사회 조직이나 중심적인 조직이 아니게 되었다. 분업과 교환이 발전하고, 정복 전쟁이 부를 확대하는 수단이 되자 공동체의 단위는 지역적으로 확대되었으며, 그 원리는 혈연이 아니라 경제적 단위로서 포괄될 수 있는 지연이 되었다. 그리고 가족은 이러한 경제적 원리에 입각한 사회에 종속되었다. 이는 가족 관계가 생산 관계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한다. 가족 관계는 사유 재산과 계급적 지배의 유지라는 목적에 종속되어 한편으로는 지배자를,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 대중을 생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가족 관계의 내용도 변화했다. 즉 남녀간의 애정과 부모 자식간의 혈연 관계라는 가장 지연적이고 인간적인 관계가 사유 재산과 계급의 유지라는 경제적 목적에 종속되었다. 이는 가족 내에 경제적 이해 관계의 모순과 대립을 심었다. 결혼에 있어서 경제적 목적이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성애를 우선하게 되었으며, 계급 관게의 유지라는 틀을 벗어나 자유로운 애정을 추구하는 자는 지배 계급과 그들의 도구인 국가 기관에 의해 가혹한 처분을 받았다. 여성의 세계사적인 패배, 여성의 남성에의 종속은 동시에 인간이 자신의 생산물에 지배되는 시대, 인간 관계가 경제적 관계에 종속되고, 인간의 본성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는 시대의 개시를 알리는 것이었다.
2) 결혼과 애정의 분리 가족 관계가 경제적 관계에 종속된 것은 지배 계급의 가족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났다. 지배자들의 가족은 사유 재산의 상속과 계급적 특권의 세습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고대와 봉건 시대와 같은 신분 사회에서 신분은 혈통에 따라 계승되었다. 따라서 가족은 지배 계급으로서의 순수한 혈통의 유지와, 아버지의 혈통이 확실한 아이를 낳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것은 두 가지를 의미하였다. 첫째로 혼인이 철저한 계급 결혼이 되었으며, 둘째로 이 혼인 관계 속에서 남성과 여성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관계에 놓였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우혼에서는 혼인은 당사자의 자유 의사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부부 중 어느 쪽이라도 혼인을 취소하고자 하면 언제라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변했다. 결혼을 결정하는 주된 요인은 신분을 유지하고자 하는 경제적 목적이었다. 애정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으며, 심지어는 전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다. 신분의 유지가 결혼의 목적으로 확립됨에 따라 결혼과 애정의 분리는 점점 더 강고해졌으며, 결혼은 당사자들의 의사에 따라서가 아니라, 신분과 지위, 재산을 물려줄 가부장의 의사에 따라 결정되었다. 결혼과 애정이 분리되자 양자가 서로 모순될 가능성이 생겨났으며, 이 가능성은 많은 경우에 현실로 되었다. 결혼은 자연스러운 감정에 기초한 두 사람의 인간적 관계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감정의 절멸, 인간적 관계의 배제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하는 하나의 강제가 되었다. 결혼은 애정의 실현이 아니라 애정의 무덤이 되었으며, 지배 계급은 그 무덤 위에서 신분적, 경제적 특권의 유지라는 강고한 집을 지었다. 결혼과 애정의 분리는 점점 더 심화되어 지배자들 사이에서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수치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결혼은 인간의 본성의 실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억압이 되었다. 이런 가족 안에서 여성은 인간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도구의 역할은 가문의 혈통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구로서의 여성에게 요구되는 것은 합당한 신분의 출신일 것과 그 남편의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이러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확실히 보장하기 위해서 지배 계급의 남성들은 아내에게 정절을 강요했다. 결혼이 애정에 기초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정절 역시 강제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었다. 아내의 정절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배 계급의 남성들은 그 최선의 방식인 애정 대신 그 최악의 방식인 감금과 격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남성의 지배를 확립하는 수단이었지만, 그 지배가 확립되면 될수록 그 대가는 남성에게도 돌아갔다. 남성들 역시 애정 없는 결혼으로 가정 생활의 행복을 잃었으며, 그들 역시 가문 계승의 도구가 되었다.
3) 축첩과 매춘 결혼이 애정과 분리되자, 자연히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애정을 구하려는 욕구가 생겨났다. 축첩과 매춘은 결혼에서 충족될 수 없는 자연적인 애정에 대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겨났다. 빚을 못갚아 채무 노예가 된 집안의 여성이나 포로가 된 노예 여성들이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소외된 관계의 다른 한편이 온전한 것일 수는 없었다. 한편에서 여성을 도구로 만든 남성이 다른 한편에서 여성을 인간으로 대할 수는 없었다. 어느 쪽이든 여성은 도구 이상이 아니었으며, 어느 곳에서도 남성은 사랑을 구하지 못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자기에게 돌아간다. 남성들은 여성을 도구로 삼은 대가를 치루어야 했다. 애정 없는 성의 결과는 남성들 자신이 성의 노예로 타락하는 것이었다. 지배 계급의 남성들의 성적인 타락과 비인간화가 얼마나 극심했는가는 다음과 같은 사례에서 나타난다.
(중국 동진 시대의) 왕개, 석숭 등은 첩도 아니고 노비도 아닌 미녀들을 양성하여 노래와 음악으로 소일의 즐거움을 삼았다. 왕개는 술을 마실 때 기생이 피리를 잘못 불어 음이 틀리거나 또 기생이 술을 권해도 손님이 다 마시지 않으면 그 기생을 때려 죽였고, 석숭은 항상 수십 명의 애첩을 거느리고 온갖 호사로운 유희를 다하였다. 매일 저녁 상아 침대 위에 사향가루를 뿌려 놓고 첩들로 하여금 밟고 지나게 하여 자국이 나지 않는 사람에게 진주 백 개의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밥을 굶겨 체중을 줄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평소에 수천 명의 미녀를 기르며 그 중에서 수십 명을 골라 온갖 금과 보석으로 패물을 만들어 차게 하고 각각 다른 향을 갖게 하여 춤추고 말을 할 때마다 색과 향이 바람을 따라 움직이게 했다. 그러나 그 기생들은 조금만 색이 쇠하면 사랑을 받지 못했다.
경제적 관계가 인간을 지배하자 인간은 그 모든 방면에서 소외되었다. 그는 노동에서뿐 아니라, 결혼과 출산에 있어서도 소외되었다. 사랑, 종족의 번식, 성은 각각 분리되었으며, 사랑은 어디에서고 도달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분리시키자 인간은 그 자신이 사랑과 종족의 번식과 성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그 노예가 되었으며, 그 각각의 관계 속에서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인간적 본성으로부터 소외되어 자신을 비인간화해 갔다.
4) 부모와 자식 지배 계급의 가부장적 가족은 부모 자식의 관계에도 모순을 심었다. 부모 자식의 관계가 사유 재산과 지위의 상속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자, 아버지의 일방적인 우위와 자식의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관계가 생겼다. 아버지는 자식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식에 대한 차별도 생겨났다. 맏아들과 나머지 자식들, 아들과 딸이 엄격히 차별되었다. 맏아들과 나머지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축소판이었다. 그러므로 가부장제 가족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 뿐 아니라 형제간의 관계조차도 자연적인 것으로부터 왜곡되었다. 재산과 지위 상속을 둘러싼 관계가 가족을 지배함에 따라 가족 관계는 평등 대신 위계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 맨꼭대기에 아버지가, 그 다음에 장남이 그리고 맨 밑에는 며느리가 자리잡은 구조. 이것이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족 구조다. 이러한 가족 안에서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불평등한 위계 구조 속에 집어넣어진다. 그는 하나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아들이나 딸로서, 맏아들이나 지차로서 태어난다. 가족은 불평등을 체험하고 무의식의 근저까지 이를 체화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기구가 되었다.
3. 성별 분업과 여성 억압
이상에서 여성의 지위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요인을 살펴보았다. 한 사회의 여성의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은 매우 다양하지만, 다른 요소들을 결정하는 가장 궁극적인 요소는 노동에서의 역할이며, 곧 분업과 소유에서의 위치다. 앞에서 말했듯이 분업은 분배를 내포하고 있으며, 곧 특수 이익과 일반 이익이 모순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노동의 분업과 더불어 고립된 개인, 혹은 개별 가족의 이익과 상호 교통하는 모든 개인이 가진 공동 이익 사이의 모순도 아울러 주어진다. 더구나 이 공동 이익은 단지 관념상의 '일반 이익'(Allgemeines)으로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노동을 분배하는 개인들의 상호 의존 관계로서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분업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인간이 자연 발생적인 사회에 머무르는 한, 다시 말해서 특수 이익과 공동 이익 사이에 균열이 존재함으로써 활동이 자유 의지에 의해서 분배되지 않고 자연 발생적으로 분배되는 한, 인간 자신의 행동은 그에 대립하는 낯선 힘으로서,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구속한다는 사실의 최초의 실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동이 분화되자 각 개인은 하나의 일정한 배타적 영역을 갖게 되고, 이 영역이 그에게 강요되기 때문에 그는 이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상은 성별 분업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남녀간의 성별 분업은 당시의 생산력의 발전 단계에서 합리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출현했지만, 이는 전체의 이익과 여성의 이익 간의 모순을 내포한 것이었다. 성별 분업에 따라 남성이 농업 노동을, 여성이 가사 서비스 노동을 담당하자, 남성은 가사 노동에서, 여성은 생산 노동에서 소외되고, 각각의 배타적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인간 자신이 분업화된 노동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성별 분업의 필연성을 인식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성별 분업은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자연을 변화시켜온 과정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다른 분업과 함께 생산력을 더욱 발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성별 분업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합리적인 해결책으로서 등장했다. 생존의 조건이 척박한 현실에서 거칠고 힘든 노동과 전쟁을 남자들이 수행함으로써 여성들의 모성을 보호하는 것이 최초의 분업에서는 오히려 주요한 측면이었다. 여성들이 모성이라는 큰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러한 분업은 당연하고도 긍정적이며 합리적인 것이다. 이는 곧 여성이 존중되고 생명이 보호되었다는 표시다. 이것은 후에 여성 억압적인 사회에서 여성들이 흔히 고되고 과중한 노동을 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성별 분업의 필연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또한 여성 해방의 필연성, 다시 말해서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성별 분업이 재규정될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그동안 여성 억압의 기원에 대해 흔히 성별 분업과 사유 재산을 분리하여 어느 한편만을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분업과 소유는 뗄레야 뗄 수 없게 관련되어 있으며, 양자가 결합해서 여성 억압의 기원을 이루고 있다. 여성 억압의 원인을 사유 재산의 발생과 분리된 성별 분업에서 찾는 것은 여성 해방 운동을 생산 관계, 소유 관계의 변혁과 분리시키는 개량주의로 인도한다. 또한 '성별 분업이 아닌' 사유 재산의 발생에서 억압의 기원을 찾는 것은 소유 관계의 변혁, 계급의 폐지로 여성 문제가 해결된다는 계급 환원론에 빠진다. 어느 것도 여성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생산 관계의 변혁과 성별 분업의 폐지(여성의 생산 노동에의 동등한 참여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를 통한)는 여성 해방을 위한 불가분의 전제이다. 또 한 가지는 성별 분업을 규정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유 재산이 아니라' 성별 분업이 여성 억압의 기원이라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두 가지의 이론적 귀결을 갖는데, 하나는 성별 분업이 순전히 생물학적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념적인 요인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성별 분업이 특정한 생산력의 발전 단계의 산물이며,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력은 여성을 대거 생산 노동에 종사하게 하여 성별 분업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해 준다. 이러한 사실은 성별 분업을 규정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관념적 요인이나 생물학적인 요인(여성이 아이를 낳아 젖을 먹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임을 말해준다. 물론 성별 분업은 농업과 목축, 혹은 농업과 공업과 같은 다른 사회적 분업들과는 달리 보다 직접적으로 인간의 자연적인 조건에 의존하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성별 분업은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발전해 온 최초의 시기에 최초의 분업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조건에 의존한다는 것은 분업의 발전이 인간의 자연적 조건을 매개로 하였다는 것 이상이 아니다. 자연 조건을 매개로 한다는 것과 자연 자체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연 조건을 매개로 하는 것은 당시의 생산력의 발전 정도에 합당하게 자연에 적응하고 자연을 이용하는 것이며, 이러한 적응과 이용 방식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화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는 성별 분업이 성별 분업의 이데올로기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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