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현들의 풍류기 술. 멋. 맛 - 원융희
비단자리 깔아놓고 금술동이 차려두니
신화란 신성한 이야기란 뜻이다. 신 혹은 신성을 가진 초인들이 등장하여 엮어가는 서사문학인데, 크게는 우주와 인류, 세계에서, 작게는 국가, 민족 내지 씨족과 마을의 성립과 원인을 설명하고 자연현상이나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해명하려는 보편적 지향성을 가진다. 한국의 신화는 제주도의 무속신화를 제외한다면 천지창조 신화가 거의 없고, 대개는 건국신화나 시조신화에 치중되어 있음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 전형으로서 주몽신화를 보자.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 주몽에 얽힌 이 신화는 단군신화와 더불어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단군신화가 환인, 황웅, 단군의 3대에 걸쳐 이루어지듯이 주몽신화역시 해모수, 주몽, 유리 3대에 걸쳐 있는 고구려 건국신화다. 이 중 주몽의 부모인 해모수와 유화의 결연에 매개적 필수물로 등장하는 것이 다름아니 술이다. 주몽신화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혹은 '제왕운기' 등에 두루 나오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 문학적 향기를 풍기는 것은 고려의 문호 이규보의 서사시 '동명왕편' 이다. 줄거리를 해설을 겸하여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하느님의 아들 해모수는 부하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웅심산에 내려왔다 한다. 웅심산이란 태백산으로도 물리는 성산이니 곧 백두산을 가리키는 것이다. 해모수는 어느날 사냥을 나왔다가 압로강변까지 왔는데 이때 거기서 유화와의 운명적인 상봉을 하게 된다. 유화(버들꽃)는 서하의 용왕인 하백의 딸인데 그는 동생인 훤화(원추리꽃)와 위화(갈대꽃)등과 수영을 하다가 잠시 물가에 나와 쉬던판에 호색한인 해모수에게 들켜 버린 것이다. 그때에 뭐 수영복이 있었겠나 팬티가 있었겠나, 멱감는다고 알몸으로 나왔다가 사내의 불꽃같은 시선을 만나자 기겁을 한 세 자매는 다투어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예나 이제나 아첨꾼 모사꾼은 있게 마련이어서, 해모수의 엉큼한 눈빛을 얼른 훔쳐 본 종자 하나가 권하여 말하되, "대왕님, 얼른 궁전을 마련하여 놓고 여자들이 방에 들거든 덮치시지요, 헤헤!" 해모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 채찍으로 요술을 부려 순식긴에 집 한채를 지었다. 그는 한 술 더떠 여기에 맛있는 술 한통을 갖다 놓았다. 일찌감치 숨어 망을 보자니 드디어 그물에 걸려들기 시작한다. 유화와 자매들은 사내가 안 보이므로 안심하고 다시 물가로 나와 옷을 줏어 입고 정석대로 함정에 빠져들었다. 어머, 여기 언제 이런 좋은 집이 있었다냐. 한 번 들어가 볼까. 조심조심 문을 열어보니 인적이라곤없는데 웬 술통이 하나 놓여 있것다. 발효향이 코를 찌른다. 얘들아, 우리 이 술 조금 먹어 볼까. 글세 괜찮을까, 언니. 조금 아주 조금만 먹어보자 얘. 한잔 한잔 또 한잔. 웬 술이 이렇게 맛이 좋더냐. 셋이 어느새 술 한통을 거뜬히 요절내고 나니, 머리가 어질어질 다리가 후들후들.이때다 싶을 때 해모수가 회심의 미소를 띠고 드디러 등장한다. 단번에 술이 확 깬 훤화,위화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큰언니 유화의 버들 같은 허리를 번개같이 나꿔채는 해모수, 이 상황을 백운거사 이규보 선생은 이렇게 읊었다.
세 여자는 임금 보자/물곳으로 피하였다./궁전을 임시 짓고/노는 모습 망보리라/말채로 땅 그으니/ 동실이 우뚝 서네./비단 자리 깔아 놓고/금술동니 차려 두니/제발로 찾아들어/주고 받고 실컷 취해./ 이때 왕이 막아 서자/ 놀라 뛰다 넘어진다./ 맏딸 이름 유화인데/ 왕이 그를 붙잡았다.
이쯤 되니 하백이 노발대발 항의할 밖에 "호로자식! 남의 귀한 딸을 납치하여 농락하다니 이 무슨 방자한 짓거리냐?" 해모수는 이미 지칠만큼 재미를 보고 난 끝이라,유화한테 "네 아비 깩깩거리니 그만 가 봐라." 하고 튕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유화쪽에서 찰거머리처럼 매달리며 가로되, "인제 자기 없인 못살아!"이다. 해모수는 마지 못해 오룡거에 유화를 태우고 용궁으로 하백을 찾아갔다. 하백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해모수가 미덥지 않아 시험을 치르기로 한다. 그리하여 하백이 수중의 잉어가 되어 도망하면 해모수는 수달이 되어 쫓아가고,하백이 공중의 꿩이 되어 날아가면 해모수는 매가 되어 덤벼들고, 하백이 육상의 사슴이 되어 뛰면 해모수는 늑대가 되어 달려든다. 이리하여 해모수는 하느님의 아들임이 증명되고 사윗감으로 합격이 되었으나,정작 하백의 심중은 불안했다. 저녀석이 내 딸년을 실컷 농락하고 뺑소니치는 건 아닐까. 더구나 오룡거를 타고 하늘로 줄행랑을 놔버리면 속수무책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친 하백은 잔치를 열고 해모수에게 독주를 퍼먹였다. 그 술은 마셨다하면 일주일 후에나 깨는 술이란다. 하백은 마침내 곤드래가 된 해모수를 유화와 함께 가죽가마에 처넣고 꽁꽁 봉해거 오룡거에 실어 출발시켰다. 하늘나라 천궁까지만 간다면 설마 제가 어떻게 못 하겠지. 더구나 제 아버지 되는 하느님 체면을 보아서라도 버리지는 못하리라. 그러나 웬걸? 오룡거가 미처 해궁을 벗어나기도 전에 해모수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취중에도 그의 상황판단은 정확했다. 그는 재빨리 유화의 황금비녀를 뽑아서 견고한 가죽가마를 찢고 몸을 빠져 나왔다. 해모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골이 비었냐? 외입질 좀 했다고 저 혹을 달고 하늘엘 가게." 그는 유화를 짐짝처럼 수레 밖으로 내동이치고 혼자만 승천해 버렸다.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 유화 ,"남자는 다 도둑놈야!" 하고 악을 쓰며 울어 보았지만 모두 부질없는 노릇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그녀는 임신까지 하고 있었으니, 화가 난 하백은 딸을 용궁에서 추방해 버렸다. 해모수의 주계는 성공했고 하백의 주계는 실패했는데, 이 사이에 신세를 망친건 유화뿐이다.
제주도 무속신화인 '차사 본풀이'에도 주계가 나온다. 강임이라는 저승사자위 기원을 밝히는 이 신화에선 요절할 운명을 타고난 젊은이 3형제가 나그넷길에 어떤 여자의 집에 자리를 정하고 하룻밤을 쉬어가기로 한다. 마침 여자가 술상을 차려 가지고 들어왔다.
드사이다 드사이다/ 이 술 한잔 드사이다/ 한잔만 먹어도 천년을 살고/ 두잔을 먹으면 구만년을 삽니다/ 석잔을 먹으면 만년을 살고
이 얼간이 친구들, 오래 산다는 말에 귀가 솔깃하여 여자가 권하는 대로 널름널름 받아 마시고 셋이 모두 곯아떨어졌다. 여자는 참기름을 팔팔 끓여 젊은이들 귀에 들이부어 삼형제를 모조리 죽이고, 그들 짐속에 있던 귀중품을 다 훔쳤다. 이 역시 술을 이용한 흉계로 순진파가 희생당하는 사연이다. 결론은 이렇다.
"세상,계집들아, 남자와 술을 조심할지어다. 세상 사내들아, 여자와 술을 조심할지어다. 안 그러면 신세 망치는 수가 있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