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프로이트 - 김정일
1장 진료실에서 쓴 프로이트 심리학
죽음의 본능
프로이트는 말년에 다음 몇 가지 관찰을 통해 기존의 자신의 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점을 발견했다.
1) 배설을 참거나 성행위 때 사정을 지연시키는 것같이 스스로 긴장과 고통을 찾는 태도가 인간에게는 있다. 2) 전쟁이나 천재와 같은 심한 외적 스트레스를 받은 경우에는 외상을 일으켰던 그 사건이 꿈속에 계속 나타나 불안과 불면증을 초래한다. 꿈은 잠을 보호하고 의식의 일방성을 보상해 편안하게 해주는데, 이 경우에는 정반대의 기능을 하는 것이다. 3) 어떤 아이들은 유년 시절에 불안을 일으키는 체험을 놀이로 재체험하곤 한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손자인 에른스트가 어머니가 외출하고 혼자 떨어져 있는 상황을 반복해서 노는 예가 그러하다...
리비도 이론으로써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런 현상에 대해 프로이트는 '죽음의 본능'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즉 인간에게는 태어나기 이전의 무기물 상태로 복귀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본능은 반복되는 자살 기도나 무의미한 위험한 모험,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자기나 주위 사람들에게 파멸을 가져다 주는 정신병적인 생활 양식 등에서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죽음의 본능은 모든 정신분석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호나이 등은 죽음의 본능도, 본능으로서의 공격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죽음의 본능'은 참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특히 언젠가 본 의학 상식에서 우리의 유전자 중에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부분이 있다는 발견을 접하고는 더욱 그랬다. 그 기사는 나이가 들면 사람은 죽게 되는데, 그 죽음은 삶이 다해 죽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죽음의 유전자가 발동해 죽이는 적극적인 것이라 했다. 아마도 그 발견이 맞다면 '죽음의 본능'의 생물학적인 타당성이 입증된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전적인 증명을 떠나서 우리 주위나 정신과 임상에서는 죽음의 본능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의 본능에 사로잡혀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때 죽은의 본능에 사로잡혀 죽음으로 돌진하는 것일까? 내 나름대로의 관찰에 근거해 정리해 보면 이러하다.
1. 삶의 끈을 놓았을 때 작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 계시다 돌아가셨는데 마지막에는 혈액 투석을 하기 위해 호흡 근육을 마비시키고 인공 호흡기를 달았다. 그렇게 초조하게 하루하루 보내는데, 어느 날 형님이 이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버님 기가 많이 빠져 보여!"
그 말을 듣고 섬뜩했지만 사실 그 느낌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버님은 84세의 나이셨지만 정신만은 정정해서 입원해서도 미소와 농담을 잃지 않으셨는데, 인공 호흡기를 달고 하루 이틀 보내면서는 갑자기 삶의 끈을 놓아 버린 것같이 약해 보였던 것이다. 그 다음날 아버님은 혈액 투석을 못 견디고 돌아가셨다.
영화를 보면 죽을 지경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사람이 최후의 유언을 남긴 후 곧 숨을 거두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그것이 의학적으로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심리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리 몸이 아파도 마지막 유언을 남기기까지는 삶의 끈을 놓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유언을 하고 삶의 끈을 놓아 버리면 죽음의 본능이 적극적으로 튀어나와 그 상처투성이의 사람을 순식간에 휩싸는 것이다.
2. "내 눈에는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몇 번째 떨어지는 방울인지 셀 수가 없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진다. 6년 동안 난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 사람을 만나서 난 얼마나 행복했고, 얼마나 수많은 시간들을 울어야 했는지... 잘난 사람이다. 정말 여느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다. 나는 너무나 비논리적이고... 뭐라 해야 좋을지... 죽고 싶다. 정말 죽고 싶다. 내 자식. 예쁜 내 자식... 엄마는 너희를 빼면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단다. 새벽 0시 30분. 돗을 입고 난 무얼 기다리는가. 죽음을 맞기 위해! 자살한 영혼은 어디에서도 편하지 않다는데... 그만 울자. 이젠 그만 울자.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져... 너무나 초라해져...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아이들도 못 보고 죽어야 하나! 어떡하지? 어쩌지? 이 모든 것이 예정된 것인지도 몰라! 며칠 전 그랬지...남편이 잘 해주고 시부모님 좋으시고 친정부모 살아 계시고 자식도 아들 딸 있고 하고 싶은 일 하고...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 같다고... 내가... 흐흐... 바로 내가..."
남편의 바람을 발견한 한 여인의 마음은 죽음을 그리는 고통 뿐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인 단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를 배신하게 되면 드에게 붙들어져 있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게 된다. 그리고 그 찢겨진 끝에는 죽음의 본능이 따라온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배신받으면서 자살하는 경우는 주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연인이 배신하자 그 집 앞에서 분신 자살하는 남자, 연인에게 버림받자 그 연인의 방에서 목매달아 죽는 여자, 남편의 내연의 처 집 앞에서 분신 자살하는 아내 등, 그 등의 자살은 처절하고 또 잔인하다. 아마도 죽음의 본능이 직접적으로 자극받자 참혹한 육신의 고통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졌나 보다...
3. 삶의 본능이 정지됐을 때 얼마 전에 (하드 타켓)이란 액션물을 보았다. 이 영화는 돈 많은 사람들의 권태를 덜어주기 위해 고안한 인간 사냥을 스토리로 하고 있었다. 건강한 한 사람을 도망치게 하고 그를 향해 총과 활을 마구마구 쏘아대는 것이다. 서구 사회에 권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느끼게 해준 영화였다. 자본주의가 발달한 서구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권태를 주체하지 못해 스스로 기벽이나 위험한 모험, 알코올, 마약, 예술, 신비주의 등에 깊이 빠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심지어 그들은 스스로 제3세계의 전쟁터로 달려가기도 하는데, 아마도 권태 속에 피어 오르는 죽음의 본능을 피하고 삶의 본능을 자극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 빠지는 사람들 중에는 뭐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부유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 또한 권태를 못 이겨 극적인 탈출구를 죽음의 유희에서 찾는 것같다. 어느 학자가 알코올 중독을 만성적인 자살이라고도 이야기했듯이.
이밖에도 선천적으로 죽음의 본능이 강한 사람도 있다. 이처럼 사람들이 죽음으로 돌진하는 경우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뒤르켐이란 학자는 자살을 이기적 자살, 이타적 자살, 아노미적 자살로 구분해 설명했다. 이기적 자살이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때 고통을 피해서 하는 자살로, 요즘 늘어나고 있는 가수들의 자살이나 청소년 자살, 주부들의 자살이 이에 해당된다. 이타적 자살이란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미가제 특공대같이 다른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을 헌납하는 경우이고,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적응이 돌연 차단된 경우, 예를 들어 중소기업 사장들이 부도 때문에 자살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뒤르켐은 자살의 주요 원인을 개인이 속한 사회 집단에서 그를 따뜻하게 받아들여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웬만한 자극으로는 자살까지 이어지지는 않고, 마음속 깊은 죽음의 본능까지 자극했을 때 자살로 이어지는 것 같다. *참고; (정신분석의 이해), D.스태퍼트-클라크 저, 이일철 역, 정음사, 1981.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16세의 남자 아이가 있었다. 그는 트럭에 사람이 치이는 것을 보고 나서부터 불안정한 감정과 성욕이 항진되는 등의 정신병이 생겼다. 그에게 왜 그러한 정신병이 생겼을까? 아마도 그는 죽음의 본능이 자극받아서였을 것이다.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은 삶의 본능(에로스)과 함께 우리 무의식을 구성하는 강한 에너지이다. 그것이 자극은 받으면 그 커다란 에너지가 떠올라 의식의 자아를 빨아들인다. 이에 따라 자아는 죽음의 공포, 정심병적인 불안을 유발하며 이와 동시에 성욕 또한 항진된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는 무의식의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 환자는 사춘기로 주체성과 자아를 강화하는 것이 성장 과제였다. 그는 주변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 자아의 벽을 쌓으며 스스로 몰두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본능이 자극받으면서 그 벽을 허물어뜨리자 자기를 상실한 정신병 상태에 빠지고 만 것이다. 깜짝 놀랄 만한 죽음의 체험을 한 다음 불안신경증이나 히스테리 정신병 등이 유발되는 경우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중앙대학교 정신과의 이재광 교수는 1989년 신경정신과 추계 학술대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모든 인간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근본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fear for death)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러나 어떤 충격적인 일을 당하면 그것이 활성화(activate)될 수 있다. 죽음의 두려움이 활성화되면 불안이 증가하고 다른 감정까지도 동요되므로 심한 병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때 안정을 취하고 치료를 잘 받으면 빨리 회복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시기에 현실적인 다른 문제로 자극을 더 받게 되면 치료가 지연되고 어떤 경우에는 더욱 더 악화되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때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와 반대로 스스로 죽음으로 돌진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나 은근히 우려가 된다. 혹시 그런 성향이 유행되어 내 주위에까지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 그 대표적인 것이 증가하는 외도이다. 얼마 전에 아내가 어떤 유부남과 바람이 나자 남편이 그 유부남의 아내를 납치해 자기 아내 앞에서 성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남자는 지금 수배중이라는데, 이 사건은 일면 끔찍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정이 가기도 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그랬을까? 그 행동의 결과는 상대방의 가정도 파괴시키지만 자기와 자기 가정 또한 파괴될 텐데...
사랑이란 큐피드의 화살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내가 상대방을 내 심장 안으로 곱게 찔러 넣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상대방이 가만히 있지 못하고 요동하다가 빠져 나갈 때 내 심장은 날카로운 화살촉에 갈기갈기 찢기고 만다. 심장이 찢기면 마음의 고통도 극심하지만 다음으로는 죽음의 본능이 자극된다. 심장이 찢긴 채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에 배산당한 사람들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예나 지금이나 흔히 볼 수 있다. 현대는 프리 섹스의 시대이고 개방화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러한 전근대적인 사건은 왜 자꾸 일어나는 걸까? 오히려 요즘 들어 끔찍한 인질극을 벌이거나 걸핏하면 자살을 하는 등 삶을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자꾸 늘어나는 것같다. 아마도 현대 문명의 발달로 삶은 편리해진 반면에 본능을 통제하는 자아의 힘이 약해져서일 것이다. 자아에는 현실 적응, 본능적 욕동의 조정 및 조절, 방어, 자율, 대상 관계 등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데, 현실이 편해지면 자아는 단련되지 않아 약해지게 된다. 현실과 마주쳐서 고생을 하고 개인적 체험이 많아야 자아 또한 강화되고 영역이 넓어진다. 그런데 발달된 현대 문명이 현실의 어려운 일 등을 대신 해주다 보니 자아는 자꾸 더 약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원시 시대 때부터 축적되어 온 본능은 여전히 이전과 같은 강도로 존재하고 있어서, 이 강한 본능이 약해진 자아의 방어를 비집고 올라오면서 자꾸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이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심장이 찢기며 솟구치는 죽음의 본능은 두 가지 양상을 띤다고 본다. 하나는 자기를 죽여서 이 고통스러운 삶을 하직하고 다시 아무 생각 없는 무생물로 돌아가고 싶은 자기 파괴의 마음이고, 다른 한 가지는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공격심이다. 그래서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죽고 싶거나 자기가 받은 고통 이상으로 똑같이 공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는 누구나 갖게 되는 본능적 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본능을 그대로 따를때는 앞의 남자와 같이 경찰에 수배될 수가 있으니 보통 사람들은 대개 그 본능을 꾹꾹 눌러 참거나 현실을 거스르지 않는 다른 식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아의 통제력이 약한 사람들은 존능의 솟구침을 견디지 못하고 본능에 지배되고 만다. 요즘 30대 주부들 사이에 애인 만들기가 유행이라느니, 남자에게 전화가 왔는데 누구냐고 묻는 남편은 가장 간 큰 남편이라느니 하면서 여자들의 바람기가 자꾸 부추겨지고 있다. 그러나 뭣 모르고 유행만 따를 일은 아니다. 자칫 어설프게 했다가 발각이라도 나면 남편의 죽음의 본능과 마주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사랑은 함부로 빠져들거나 시험할 일은 아니다. 사랑은 인간의 본능과 뿌리 깊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람피우고 싶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각오하고 시도해야 한다.
콤플렉스
콤플렉스는 장애물이지만 많은 노력을 하도록 자극하여 새로운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콤플렉스는 바로 정신 생활의 초점이다. 우리는 이것 없이 살고 싶어하지 않고, 이것이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없으면 정신 활동까지도 정지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불멸의 연인)이라는 영화는 베토벤이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은 상처가 평생 남아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신동인 아들에게 큰돈을 기대했던 아버지는 베토벤이 기대에 못 미치자 마구 때렸던 것이다. 물론 그 고통을 베토벤처럼 예술적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악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콤플렉스가 사람의 한평생을 질곡이나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누구나 가만히 자기 인생을 돌이켜 보면 자기 인생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큰 힘 중의 하나가 콤플렉스임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콤플렉스란 도대체 무엇일까? '콤플렉스'란 용어는 1895년 브로이어(J. Breurer)가 (히스테리의 연구(Studies on hysteria, 1895))라는 논문에서 처음 사용했다. 그는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무의식적 사고 및 기억의 집합체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융은 언어 연상이 정서적 요인에 의하여 지연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의식적인 통제에 복종하지 않는 무의식적 심리 내용의 집합체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사전적으로 콤플렉스란 '비슷한 감정적 강도를 갖고 있으면서 우리들의 태도나 행동에 아주 강하게 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주는 상호 관련된 사고들 또는 충동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콤플렉스는 왜 생기는 걸까? 내가 보기에는 성장 과정에서의 상처나 아픔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무리 뚱뚱한 사람이라도 성장 과정에서 놀림을 받고 자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콤플렉스의 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 콤플렉스의 근저에는 강한 경쟁심이 배태되어 있지 않을까한다. 즉 5억 마리의 정자 중에서 앞선 한 마리가 생명을 얻었듯이 사람은 누구나 최고가 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욕망이 여러 가지로 좌절됐을 때 그는 강한 콤플렉스를 느끼면서 남들을 앞서고자 스스로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콤플렉스는 성장 과정에서 경쟁심을 심하게 느끼는 청소년이나 신세대들에게서 특히 많이 발견되는 것 같다. 그들 사이에서 은어로 또는 농담으로 많이 얘기되고 있는 콤플렉스를 나열해 보면 이러하다.
. 머리 나쁜 건 용서해도 못생긴 건 용서할 수 없다는 '외모 콤플렉스' . 순간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신데렐라 콤플렉스' . 남자는 여자 만나기 나름이라는 '온달 콤플렉스' . 어릴 때부터 착하고 얌전하다는 얘길 들어 왔어요. 그래서 전 늘 착해야 돼요'라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 . 맏아들은 집 안의 희망이요 태양이라는 '장남 콤플렉스' . 희생과 봉사만이 내 인생의 전부라는 '맏딸 콤플렉스' . 얼굴로 안 되면 몸매로 승부한다는 '람보 콤플렉스' . 컴퓨터 박사가 되야 한다는 '컴맹 콤플렉스' . 외국인 앞에서 영어 한마디도 못하면 내 인생은 끝이라는 '영어 콤플렉스' . 무엇이든 알게 되면 말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진리의 메가폰 콤플렉스' 등...
그러나 콤플렉스가 그 사람의 발전을 위한 노력을 자극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람을 삼켜 버렸을 때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 같다.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복잡하다. 그들은 콤플렉스가 적은 사람들에 비해 예민하고 생각을 많이 하며, 남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남이 자기에게 어떤 의도를 갖고 대하는가 등 등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러다 보면 대인 관계나 의사 소통도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콤플렉스가 무엇인지, 자기가 어떤 색안경을 끼고 있는기를 확실히 알아서 적절히 극복해야 할 것이다. 콤플렉스가 지나치게 해로운 작용을 하는 경우에는 콤플렉스에서 그 개인을 벗어나게 해야한다. 그것은 오직 콤플렉스의 실질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정신치료로써만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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